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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만행(2) 제주의 땅으로 들어가다




진주에서 순천은 한시간 반 거리다. 순천은 항상 나에게 의미가 있는 도시였다. 형제가 많은 우리집은 자식들이 농사일에 곧바로 연결되는 노동력 그자체였다. 그래서 아이를 많이 낳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막내인 나는 항상 ‘집보기’가 나의 역할이다. 형제가 많아서 좋은 점도 종종 있지만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학교진학이 문제였다. 등록금이 문제인것이다. 지금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지만 내가 자랄때만 해도 ‘여자가 무슨 학교? 그것도 고등학교까지 마치면 넉넉한거지!’하던 때가 있었다.

여하튼 셋째누나는 기를 쓰고 대학가려고 했고, 먼 친척의 도움으로 순천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다니던 나에게 ‘공부’하라고 밤이고 새벽이고 깨웠던 누나다. 순천의 대승사라고 하는 절에 스님이 먼 친척이라 절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인연으로 불교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큰 스님의 법문테이프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알듯 모를 듯 하는 지루한 이야기일뿐이었다.

재수할 때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순천에 있는 대학교로 갔다. 사천이 고향이고 진주가 주된 생활권이었지 순천이 생활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범대학을 가고 싶어했던 그 친구는 순천으로 갔다. 함께 재수하던 창균이와 결혼해서 지금은 창원에서 살고 있다. 함께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 기억이 남다르다. 아직도 창균이와는 1년에 한번이나 두 번정도 생각날 때 마다 불쑥 불쑥 전화하는 사이다. 그래도 첫 인사가 ‘반갑다, 오랜만이다’하는 말은 없다. 어제 만난것 처럼!



그러한 인연을 안고 있는 순천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책 한권 펴 들었다. 언젠가 원영님이 <윈터홀릭 -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이라는 책을 반값에 샀다고 좋아하며 빌려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저자의 두 번째 겨울이야기인데 <윈터홀릭 두 번째 이야기 : 다시 만난 겨울 홋카이도>라는 책을 펼쳤다. 이 저자의 이야기는 쏙 빨려들어가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혼자서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기록해 놓고 있다. 조금씩 읽다가 보면 어느새 나는 혼자이고 추운 겨울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런 느낌을 준다.


여행이라는 것이 다 그런걸까? 버스에서 혼자라는 생각속에서 나도 여행자의 한 사람이 되어있고 겨울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고독감과 동질감을 느낀다. 1년의 삼 분의 일을 눈과 함께 생활하는 눈의 나라 홋카이도에 서 있지는 않지만 고독의 땅, 남해해안선을 따라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과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사무치는 강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

사진이 중간중간에 있지만 끌리지는 않는다. 뭔가 어둡고 칙칙한 사진밖에 없다. 언젠가 사진전문가 이문선씨의 작품들을 보면서 ‘전문가의 사진은 약간 어둡게 찍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서인지 이 사람의 사진이 전문가의 사진이라 어둡고 칙칙한가 할 정도다. 간혹 길게 눈을 뗄 수 없는 장면들도 있다. 마치 내가 그 안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읽던 책을 몇 장이나 넘겼을까? 차는 순천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쉽게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서 4시간 넘게 와서는 곧바로 완도행 직행버스 표를 끊었다. 다시 4시간 가량 달려야 한다. 직행이라 곧바로 가는 줄 알았는데 중간 중간 읍내는 다 들렀다. 마치 시골 완행버스처럼.


순천-벌교-보성-장흥-강진-해남-완도



순천에서 출발한 버스가 벌교에 잠깐 멈추었다가 출발한다. 어딜가나 겨울나목은 햇빛을 온몸으로 받는다. 또 양지바른 곳에는 잘 깎은 묘지가 볕바라기를 하고 있다. 남쪽지방은 마을마다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나무들은 간혹 부는 바람에 낯간지럽다는 듯이 제 잎을 뒤집고 휘청거린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새로 시작할 즈음의 추운 겨울이라고 하지만 남쪽지방의 추위는 그리 문제될게 없다. 가을 추수 끝낸 들판에는 전봇대만 추리하게 서 있다.

버스는 다시 대나무밭 사이로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차밭이 곳곳에 보이는 녹차의 고장 보성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내 곳곳에는 지자체에서 녹차와 보성을 광고하는 문구가 보인다. 굳이 차밭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곳이 보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타는 사람이 없어 보성터미널에서 곧바로 차는 빠져나와 다시 장흥으로 달린다. 제주도 가는 가장빠른 배가 장흥에서 개통되었다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 장흥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나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던 곳이다. 장흥터미널에서는 타는 사람이 없어도 몇분간 정차해있다. 혹시나 해서 잠깐의 시간에 내려서 제주도 가는 배표를 구할 수 있나 알아보려는데 곧 출발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제주도 가는 배표는 이미 몇 달 후까지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아마도 이 지방 사람들은 제주도 가는데 비싼 비행기타는 것보다 시간도 훨씬 짧게 걸리고 돈도 싼 배를 이용하는게 좋을게다.

장흥터미널을 벗어나자마자 앞산의 귀이하게 생긴 큰 바위산이 보인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 사이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강진에 들렀다. 그리고 잠시후 이정표에는 해남이 보인다. 해남은 땅끝마을이 있는 곳인데 도대체 이 버스는 어디로 돌아서 완도로 간단 말인가? 해남 땅끝마을에 있는 미황사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남창이라는 마을에 잠깐 섰다가 다행이 미황사쪽으로 가지 않고 지나쳐간다. 얼마 안있어 바다가 조금씩 보이면서 이정표에도 ‘완도’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가 보이면서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바닷가 사람들의 애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바다만 보면 편안해지는 뭔가가 있다. 어딜가도 구불구불한 도로에는 가을걷이 끝난 논밭이 있고, 야트막한 언덕같은 밭가에는 무덤이 옹기종기 있다. 경상도지역을 여행하면 도로옆에 큰 산이 대부분이라 터널을 지나거나 높은 산에 둘러싸여 달리기만 하는 반면 전라도지역을 여행하면 넓고 편안한 평지가 나온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검은 진흙 논과 습기는 메말라 보이는 붉은 황토흙 밭이 서로 대조적이다.


내 기억속에 완도는 두 번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인지, 재수를 마친 시점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20대 초입에 그렇게 무작정 떠나서 온 곳이 완도였다. 한 밤중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공사장 같은 느낌이라 실망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 완도=김 이라는 공식같은 지역특산물로 기억되던 곳인데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아마도 읍내를 찾아 돌아다니다보면 이것 저것 만날 수도 있고 역사를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어린 나이에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그러고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은 빈틈없이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완도터미널에 내려서 여객선터미널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택시를 타야 한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한참을 지났지만 여객선터미널에서 일단 제주도 가는 배표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들의 영원한 로망이었던 ‘제주여행’이 쉽게 성사될 수 없지 않은가? 안되면 남해안을 따라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한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위안하면서 터미널안으로 들어선다. 평일이라 그런지 텅텅비어있고, 운동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무리로 보이기는 하지만 한산하다. 물론 제주도 가는 배표도 있다.

휴가기간동안 어딜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못갈지도 모르니까. 다행이 표가 있어 제주도로 가기로 하고는 완도의 여객선터미널 앞에 ‘제주 돌하루방’ 사진을 찍어서 지인들에게 보냈다. 마치 제주도에 온 것 처럼. 근처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시간에 맞추어 배에 올랐다.



5-60명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들이 곳곳에 있었다. 적당히 가방을 내려놓고는 실내에만 있을 수 없다는 설레임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육지와 끝없는 포말이 들뜬 마음에 인사하는듯하다.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제주도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눈이 시릴까봐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은 제주의 불빛을 먼저 만났다. 그렇게 제주의 땅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