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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미니갤러리 7번째 : 잉태(孕胎)



한 점의 사진으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어가는 미니갤러리 일곱 번째 전시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나날이 새날이 밝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의미를 더해봅니다.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학교폭력, 청소년 자살,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이야기, 뭉치고 흩어지는 선거이야기,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다 지나가겠지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어가기도 할 것입니다. 누구하나 들여다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이번 작품 <잉태>는 이러한 세상의 소리를 보고 어루만지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듯합니다. ‘씨앗’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통과 절규에 귀 기울이고 오만한 인간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작품에 비장미가 뚝뚝 흐른다든지 어둡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회화기법으로 표현한 <잉태>의 색깔은 곱습니다. 지혜의 색인 노랑색이 바탕이고, 생명과 희망의 상징인 초록색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줍니다. 겨울 찬바람이 한 해의 시작을 알리지만 미니갤러리는 따뜻하게 시작합니다.
<행복한책방>에서 열리는 미니갤러리는 <에코동의 서재>, <법보신문>, <휴심정>, <한겨레출판>, <시공사>, <김영사>가 공동주최합니다. 수익금을 기부하는 새로운 기부프로그램 <미니갤러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전시안내
◈ 전시명 : 행복한책방 미니갤러리 7번째 - 잉태展
◈ 일시 : 2012년 1월 13일(금) ~ 2월 6일(월) 오전 9:30-오후6:00
※ 1월 13일 오후 3: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책방 (02-587-8991)
◈ 온라인전시 : 에코동의 서재(http://ecodong.tistory.com)
◈ 공동주최 : 행복한책방, 법보신문, 에코동의서재, 휴심정, 한겨레출판, 시공사, 김영사



> 사진소개

<잉태> 118cmX70cm, C-print, 박영숙.이문선, 2012 행복한책방

잉태(孕胎)

바람이 차다. 콧속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흰 김을 뿜어낼 정도로 맵다. 이 추운 날 예수님이 오셨다.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고 지위가 높은 자를 낮추고 비천한 자를 높이려고 오셨다 한다. 또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러 오셨다고도 한다. 이렇게 큰 뜻을 품고 행하는 성인(聖人)의 어머니 역시 그렇게 살았다. 성인을 잉태한 동안 그런 선한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예수가, 부처가 태어났다.

이 작품은 디지털 회화기법이라는 다소 생소한 방법으로 탄생했다. 단순히 카메라로 찍어 뽑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손을 덧대 태어난 작품이다. 디지털 회화기법은 디지털 콜라주, 디지털 합성사진 등 여러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도 쓰인다. 한 장의 사진을 전시하며 갤러리를 열고, 그 수익금을 기부하는 미니갤러리에는 그동안 다양한 표현기법들이 적용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가령,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다시 찍고, 그 사진에 색을 새로 입히는 과정을 거치는 등 일반적인 ‘사진’의 개념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진’이나, ‘사진작품’이라고 하면 카메라와 대상이 있어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떠올린다. 세밀화나 정물화보다 더 사실 같은 그림을 우리는 사진이라 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사진적 사진의 개념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생소하고 어색해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만나는 것 자체가 행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사진, 그림, 예술 등에 대해 전문적으로 학습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는 세계를 조우하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작가로 디지털 콜라주의 대가인 메기테일러(Maggie Taylor)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해학적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연민의 슬픔이 번지기도 하면서 관객들을 울고 웃기는 광대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사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진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메기테일러의 작품세계와 이번에 전시되는 <잉태>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진적 사진, 사실적 사진을 살짝 비틀어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 즉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공상의 세계를 컴퓨터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는 사진가로서의 ‘행(行)’은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씨앗과 잉태

‘씨앗’은 시작이기도 하고, 마무리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의 출발을 의미하는 시작으로서의 씨앗과 그 생명의 성장과 수확, 결실의 마무리인 씨앗은 같다. 그것이 출발이고 그것이 멈춤이다. 끝이 있고 다시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발이 곧 도착이며, 시작이 곧 마무리이다. 이것은 처음과 끝의 경계를 말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즉, 시작이 있고 끝이 존재한다는 유한계적 가치관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분명 세속적 인간의 가치 잣대로 바라볼 때, 생명현상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시작이 있고 그 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종말론적 세계관이 형성되고 사람들은 스스로 나약한 존재가 되어 속죄하며 무서운 형벌을 피해가려는 얄팍한 수를 쓰기도 한다. 저 옛날 바다 끝은 절벽과 같은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바다 끝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순환과 연속의 연결고리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 것을 주문하는 붓다의 외침이 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삶으로 전환이 가능한 윤회를 말하는 것도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씨앗과 공동체정신

존재의 출발이며 그 마무리인 씨앗을 표현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생명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의 존엄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이다.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춘다면 다른 사람을 함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공동체정신의 기본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기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믿고 있다. 이를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투쟁과 전쟁이 일어난다. 거꾸로 우리 삶을 파괴하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따라가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순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가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면 다른 생명가진 존재들도 이미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갈등과 경쟁으로 해체된 공동체는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생명가진 모든 존재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공존을 꿈꾸는 것이 공동체를 새롭게 만드는 길이다.

여기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이다. 숨을 헐떡이며 오장육부를 갖춘 생명도 생명이거니와 바람과 물과 나무와 바위 등 무생물이나 의식 없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것인가? 더 많이 갖고 쓰기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는 것은 멈추었다 치자. 갈등하고 경쟁하지는 않지만 혼자서 많이 갖고, 많이 쓰기 위해 이러한 자연을 무분별하게 채취하고 쓰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또한 자멸(自滅) 내지 공멸(共滅)의 길이다.

생명 가진 존재들이 생노병사(生老病死)하듯 무정물도 모양을 갖추어 존재하다가 무너져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변화를 생명현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잉태>는 ‘씨앗’이라는 존재를 통해 삼라만상의 생명현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씨앗’이라는 실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생명까지도 보살피고 있다. ‘있음’을 통해 ‘없음’을 말하고, 다시 그 ‘없음’이 삼라만상이라는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씨앗’의 본질이다.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다

디지털 회화기법으로 완성한 이번 작품은 우리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의 행태와 가치관을 제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요즘 학교폭력문제, 청소년자살문제 등으로 대두되는 사회문제와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고 접근하는 것은 미봉책의 연속일 뿐이다. 또 ‘죽으면 끝’이라는 극단적 사고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가족, 사회에 슬픔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꽃을 시작으로 색깔로 말을 걸고 실상을 바라보는 눈을 깊게 하는 이 작품은 ‘잉태’라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연관과 조화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깊은 성찰, 그것으로 이어진 개인과 사회, 자연이 어우러진 삶 말이다.

복잡다단한 자연계의 색은 단순화된 ‘색(色)’을 통해 성찰의 깊이를 더해준다. 인간의 오만과 독선으로 우리 사회와 자연이 함께 병들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지만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세계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는 ‘씨앗’과 ‘잉태’를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의 제목을 <잉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 위에서 이어진 예수의 삶, 부처의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가슴 아팠을까 하는 심정을 넘어 생명을 향한 자비와 사랑, 열정을 새겨야 한다. 비단 두 성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 또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 법보신문 | 디지털로 하나된 수백 꽃의 생로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