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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5차 미니갤러리 : 눈물



분홍색과 눈물을 통해 본 생명 네트워크
2011.9.23(금) ▶ 10.24(월)

가을이 저만치 오는 날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행복한 책방>이 주최하는 기부문화프로그램 <미니갤러리> 다섯 번째 전시회가 마련되었습니다.
가을이 훌쩍 다가왔습니다. 이번 작품 <눈물>은 온통 분홍색입니다. 그리고 눈물 맺힌 얼굴 옆면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분홍색>과 <눈물>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홍색>이 갖는 순결과 순수의 미소위에 <눈물>이 갖고 있는 정화와 소통의 이미지는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생명과 생태적 네트워크가 절실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홍색>과 <눈물>이 갖고 있는 생명가치에 대해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책방>에서 열리는 미니갤러리는 <에코동의 서재>, <법보신문>, <휴심정>, <한겨레출판>이 공동주최합니다. 수익금을 기부하는 기부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미니갤러리의 수익금은 국제구호단체 JTS에 기부될 예정입니다.

◈ 전시명 : 행복한책방 미니갤러리 다섯 번째 - 눈물 展
◈ 일시 : 2011년 9월 23일(금) ~ 10월 24일(월) 오전 9:30 ~ 오후 6:00
※ 9월 23일 오후3: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 전시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주최 : 행복한 책방 · 에코동의 서재 · 법보신문 · 휴심정 · 한겨레출판



<눈물> 85X118cm, C-print, 박영숙·이문선, 2011 행복한책방


> 사진소개

가을이다, 가을이다 하면서도 정작 그 가을을 느끼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것 외에는 특별히 없다. 어려서는 시골에 살면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오히려 24절기가 말해주는 의미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절기가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느낀다. 입춘이라고 해서 따뜻한 봄이 오는 게 아니라 가장 추울 때고, 입추도 더운 8월에 있지 않은가? 또 동지는 해가 가장 짧아 어둠이 가장 길고 가장 추워야 하는데 진짜 추위는 동지를 한참 지나서 온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에서도 알수 있듯이 우리들의 인생에서 사회적 관습이나 지식, 습관, 경험 등을 잣대로 하여 스스로를 속이거나 속으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벽예불 후 뒤뜰에 뒹구는 낙엽들이 눈에 들어온다. 짙은 갈색은 흙색이다. 그건 땅의 빛깔이다. 말라서 오그라든 그 흙빛의 낙엽들이 바람결에 움직이는 것이 가을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땅의 빛으로 돌아가는 이 가을에 다섯 번째 미니갤러리 문을 연다.


1. 빛과 색

가을이라고 해서 특별히 상징되는 색깔이 있을까? 봄이라고 하면 노오란 개나리가 떠오르고, 여름이면 새파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떠오르고, 겨울이면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하늘과 경계가 모호한 산이 떠 오른다. 가을은 칙칙한 흙빛 말고는 특별히 떠 오르는 게 없다. 아, 있다면 해질녘 붉은 노을정도면 어떨까? 이렇듯 계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있고, 색이 있다. 가을이라고 해서 이번 작품이 붉은 노을같이 화려하거나 흙색처럼 칙칙하지도 않다.

이번 작품 <눈물>은 온통 핑크빛이다. 그리고 눈물 맺힌 얼굴 옆면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사진 소개는 이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지만, 작가의 작품세계, 의식세계의 범위는 어떻게 헤아릴까 싶다. 그 작품이 말하려는 절규에 귀기울이고 싶다.

먼저 작품<눈물>이 말하는 빛과 색에 대해 말해보자. 온통 핑크빛이다. 뭘 말하려고 했을까? 숨은그림찾기 하듯 요리 조리 살펴보면서 계속 되뇌던 말이다. ‘핑크’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석하려고 하기보다 그 색깔을 떠 올릴 것이다.
‘핑크’는 ‘하얀빛을 띤 엷은 붉은색’이고 우리말로 ‘분홍’이라고 한다. ‘패랭이꽃’을 ‘핑크’라고도 하는데 어릴 적 여름에 소를 몰고 강으로 들로 산으로 다니다보면 쉽게 만나던 꽃이다. 패랭이꽃의 꽃말은 ‘순결한 사랑’이다.

‘핑크’를 검색하다보면 미국의 팝아티스트 가운데 ‘핑크’가 소개되어 있다. 그녀의 대표곡 ‘So What’은 ‘핑크’의 쿨한 개인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패랭이꽃의 꽃말은 ‘순결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면, 가수 ‘핑크’의 <So What>은 ‘쿨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하얀빛을 띤 엷은 붉은색, 연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스러운 색. 이 ‘핑크’의 색이름은 15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떤 이는 ‘빨강의 명도를 높였지만 자청색, 자홍색 등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하면서 ‘주로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남자아이의 것은 파란색계통의 짙은 네이비, 여자아이의 것은 이 ‘핑크’로 물든 것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것이 가방이든, 신발이든, 옷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단지 색깔로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구분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렇게 구분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저항’이라도 하듯 붉은색 계통의 물건들을 구입하곤 했었다. 마치 ‘나는 단지 색깔만으로 여자용과 남자용으로 구분짓는 나이는 넘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핑크(pink)’는 우리말로 ‘분홍(粉紅)’이라고 한다. ‘핑크=분홍’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우리들의 관념세계에서는 핑크와 분홍은 분명 다르다. 눈으로 보이는 색깔과 빛은 같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각각 풍기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이다. 핑크의 이미지는 노란색을 물들인 파마머리를 나풀거리는 10대의 소녀이미지라면, 분홍은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빗어 앞가르마를 하고는 비녀를 꽂은 한복 입은 여인네의 이미지다. 핑크는 ‘시트콤’이라면 분홍은 ‘사극 드라마’쯤 된다.

이번 작품 <눈물>은 분명 분홍의 무거움도 있지만 핑크의 가벼움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색깔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의 사상이나 민족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지만 여기에서 ‘민족성’을 운운하며 분홍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적확하지는 않다. 가느다란 눈을 떨어뜨리고 분홍저고리 옷고름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미소 짓는 여인네의 순결한 미소가 담고 있는 아름다움과 순수 그 자체가 ‘분홍’에는 있다.

한편, 그 ‘순결한 미소와 순수’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남자들은 섹시코드로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녀 간의 연애를 표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관능적 성질의 ‘에로티시즘(eroticism)’과 성행위의 직접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는 분명히 서로 구분되지만 색깔에 있어서는 공통적으로 분홍색이 더 어울리는 것은 그 때문일까?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이라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가 있다. 이 작가의 작품가운데 32개국에서 번역출간된 『내 이름은 빨강』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빨강’이다. 말그대로 ‘빨강’이라는 색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내 온몸의 감각기관들을 동원해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졌을때, 입 안에 넣었을때, 냄새와 크기 등을 비교하면서 말이다.

또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육신의 눈으로 단순히 ‘보는 행위’로서의 ‘봄’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빨강’이 풀어놓은 이 말뜻은 ‘분홍’을 온천지로 휘감아 놓은 <눈물>의 작가와 상통할 것이다.

그러면 한번도 ‘분홍’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손끝으로 만지면 뽀송한 솜털이 파르르 떨리는 소녀의 팔목을 잡은 느낌이고 입안에 넣어 혀를 굴리면 침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리는 솜사탕 같은 맛이다. 풋풋한 봄 냄새를 담은 숲속 향기 같고 송편을 빚으려고 반죽해 놓은 쌀가루반죽을 한움큼 쥐고 있는 것처럼 말랑말랑하다.

빛과 색깔 자체에 무슨 특별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약속을 통해 특별함이 생겨나는 것 같다. 부드러움과 곡선, 자연과 모성, 여림과 보호 등으로 표현되는 ‘분홍’은 ‘에코페미니즘’에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연두빛보다는 분홍빛에 더 가깝다.


2. 눈물

이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가의 배려가 보인다. 굵은 눈물 뚝뚝 흘리는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보기는 힘겹다. 처음 보는 사람과 눈 마주쳤을 때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속의 모델은 우리들의 그런 심정을 알기나 하듯 옆으로 돌아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의 팝아트 작품 <행복한 눈물>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작품자체의 특별함보다는 그 가격 때문이다. 수십억 대를 호가하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 재벌 비자금 사건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만화 같은 작품속의 여인이 흘리는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가득 묻어나는 '행복한 눈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미묘한 선과 색의 차이일까?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팝아트’는 1960년대 대중문화(popular culture)와 미술(fine art)이 결합하여 탄생한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말한다.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산업사회 속에서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삶의 폐해에 대해 문제제기 했던 기존의 ‘미술’과 달리 ‘팝아트’는 상품과 광고, TV와 영화 등 '대중문화'의 영역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팝아트’가 갖는 속성을 두고 ‘기존 미술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하거나, ‘새로운 창조의 예술행위’라고 칭찬하는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깊이’가 없다. 팝아트의 한계 때문인지 ‘제목’과 제목에 어울리는 ‘눈물’밖에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행복한 눈물>의 한계를 지적하고, 통속적인 요소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작품<눈물>을 탄생시켰을까.

‘눈물’은 우리 삶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슬픔과 회한, 기쁨과 안도, 분노와 저항의 눈물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그로 인한 슬픔의 눈물은 함께 지켜보는 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광활한 중국대륙의 땅을 보는 순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라고 한 것이 기쁨의 눈물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수행의 과정에서 ‘크게 분노하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의 어리석었던 삶에 대해 원통해하고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원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분노의 눈물도 마찬가지다. 변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서원이 담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의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이 눈물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일까.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했다. 일상의 삶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눈물’을 통한 참회의 순간 때문일 것이다. 참회의 눈물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과는 또 다르다. 정화의 과정이다. 참회의 눈물은 과거 삶에 대한 반성이다. 또,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생각과 지식 등 알음알이에 대한 근본적 부정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눈물>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이야기하고 있다. 눈물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새로운 인생

이번 작품 <눈물>은 온통 분홍색이고, 눈물 흘리는 얼굴 옆면이 클로즈업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빛과 색, 그리고 눈물이라는 주제어들의 결합을 통해 작가가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내내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바라본 ‘분홍색’과 ‘눈물’이 주는 메시지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색(色, color)’은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존재의 근본 입자를 살펴보면 텅 빈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단순히 존재의 있고 없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분홍색’을 통해 작가가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존재의 본질은 텅 비어 있다는 깨달음은 무상(無常)의 변화를 체득하게 만든다. 즉 작가는 ‘색(色)’을 통해 ‘공(空)’을 말하고 있다.

둘째, 소유와 소비중심의 생활패턴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눈물>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팝아트 작품<행복한 눈물>과 연동되어 풍자하고 있다. 소유와 소비를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는 지금의 산업사회의 소비구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과 기쁨을 향해 선택한 모든 일이 거꾸로 재앙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다음세대에게 빌려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잘 돌려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눈물’을 통해 ‘만족’과 ‘나눔’을 이야기하고 있다.

셋째,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분홍색’이 주는 이미지는 순결한 10대 소녀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면, ‘눈물’은 긴 세월의 터널을 지나온 성숙한 여인의 회한과 참회를 전하고 있다. 이 두가지의 섞이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 반면, ‘진실된 삶’이라는 아름다운 명제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 현대미술 화가인 위에민쥔(Yue Minjun 1962 ~ )은 ‘차라리 가난해서 굶어죽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다 죽는 것이 세상에 속지 않고 내 인생을 살다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비유가 다소 극단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 간절함은 명징하다. 하지만 온갖 이유를 대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자신의 인생에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이와 같이 <눈물>을 통해서 색깔과 눈물이 주는 상징적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분홍색이 갖는 부드러움, 순결과 순수의 이미지 위에 눈물이 가지고 있는 깨끗함, 성찰과 소통의 이미지가 더해진다. 이문선 작가는 <눈물>을 통해 우리들에게 강요하듯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생명과 생태적 네트워크가 절실하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은 ‘분홍색’과 ‘눈물’이 갖고 있는 생명가치에 대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속지 않고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참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극한(極限)의 분별심속에서 자신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수행이다. 그 극한의 순간을 맞닥뜨려 가벼워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이것이 <생명과 생태적 네트워크>를 통한 <행복한 삶>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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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석동(에코동의 서재 : http://ecodong.tistory.com)


> 법보신문 : 분홍빛 눈물이 전하는 참회 그리고 생명
> <눈물>의 작가 - 이문선, 박영숙 부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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