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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미니갤러리 6번째 : 환희의 땅



2011.10.31(월) ▶ 11.30(수)

한 점의 사진으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어가는 미니갤러리 여섯 번째 전시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의 기온이 다릅니다. 가을 들녘의 황금물결은 겨울을 부르는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행복한책방>에서 열리는 미니갤러리는 <에코동의 서재>, <법보신문>, <휴심정>, <한겨레출판>이 공동주최합니다. 수익금을 기부하는 기부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미니갤러리의 수익금은 정토수련원에 기부될 예정입니다.

◈ 전시명 : 행복한책방 미니갤러리 여섯 번째 - 환희의 땅 展
◈ 일시 : 2011년 10월 31일(월) ~ 11월 30일(수) 오전 9:30 ~ 오후 6:00
※ 10월 31일 오후4: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 전시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주최 : 행복한 책방 · 에코동의 서재 · 법보신문 · 휴심정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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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개

<환희의 땅> 118cmX70cm, C-print, 박영숙․이문선, 2011 행복한책방


변화무쌍하다. 날씨와 기온이 그렇고, 우리들 마음이 그렇다. 이것들이 모여 인생(人生)이 된다지만 그 끝을 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집하며 살고 있나보다. 가을은 여름과 겨울의 사이에서 서로의 끝과 처음의 자락을 밀고 당기면서 눈 흘기고 있다. 오랜 세월의 눈 흘김 속에 자신의 위치를 찾고, 그 안에서 환희의 빛을 담는다.

미니갤러리가 처음 문을 열고 시작한지 여섯 번째를 맞이한다. 고작 열 번도 채 안 되는 전시회를 두고 서둘러 평을 하기에는 뭣 하지만 그 시간의 깊이만큼 사람들의 마음은 넓어지고, 손놀림은 빨라졌다. 또 마음 한켠에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도 있지만 서서히 부담 같은 무거움도 함께 생기고 있다. 아마도 미니갤러리가 담으려고 하는 빛깔이 결코 소박하지만은 않기 때문일 게다.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환희지(歡喜地)>라고 이름 붙여서 왔다. 좀 어렵다. 뭔가 깊은 철학을 아로새겨야 조금은 이해할 듯한 오랜 문학적 냄새가 있고,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모두 입을 닫는다. 그래서 이름을 살짝 비틀었다.『환희의 땅』이라고 붙였더니 조금은 가슴이 트인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같은 말이기도 하고 다른 뜻이기도 하다.

본래 <환희지(歡喜地)>가 갖고 있는 뜻은 보살(菩薩)이 부처가 되는 수행(修行)을 열 단계로 나누어 십지(十地)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제일 단계를 말한다. 번뇌를 끊고 마음속에 환희를 일으키는 경지, 성인의 경지를 상상해 보지만 쉽지 않다. 마음에 기뻐함이 많다는 뜻인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중생에 대한 측은함과 연민의 정도 함께 포함되겠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모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한 것은 마음속에 번뇌를 다하고 기뻐함이 많을 때 가능한 모습일거다. 이러한 성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환희지’가 아닐까 싶다.

작가는 콜라주기법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에 귀기울여보면 한 가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되뇌고 있다. 어둠속의 황금빛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국화꽃이 허공에 떠 있고, 벌거벗은 남자가 자신을 단단히 여미는 여자를 안고 있다. 또 부처와 달팽이와 개의 모습이 보인다. 많은 것을 나열해놓고 설명하듯 작품 속으로 끌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다. 서로의 연관을 발견하고 어둠속에서 황금빛으로 전이되는 가르침을 자각할 때 작가는 한시름 놓을게다.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을 좇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다. 남자들의 욕망세계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강한 에로티시즘 외에도 물질적으로 소유하려는 강한 이성을 갖고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그 ‘자유’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몸을 방어하듯 팔을 감고 있지만 남자의 품안이다. 아이러니다. 벗은 남자와 입은 여자의 관계에서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공간적으로 함께 있으되,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결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있다. 스스로 ‘괴로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다.

갑자기 오싹하다. 거울 앞의 아이가 돌아볼 때 거울 속의 아이는 그대로 있는 어느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벗은 남자와 입은 여자의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인간 삶에 대한 적극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거기의 동의하면서 ‘내 삶은 어떠한가?’ 라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공포영화의 섬뜩한 장면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매일 만나는 일상의 삶을 마주하며 고개 돌리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법륜스님은 남녀의 인간관계를 다룬 <스님의 주례사>와 부모와 자녀사이의 관계를 다룬 <엄마수업>에서 힘들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라고 일러준다.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괴로움과 고통을 만났고, 그 원인들을 제거해 달라고 하소연하지만 한결같이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는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일갈한다. 이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복잡하다고 하고 어렵다고 하는 인간관계의 현실세계를 한 장면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 환희의 땅에 들게 되리라.


개의 불성과 딜레마

열반경에는 ‘일체중생 실유성불(一切衆生 悉有佛性) : 모든 생명가진 존재들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 있다. 선의 화두가운데 조주스님의 무자(無字)화두가 유명하다. 한 스님이 스승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모든 생명가진 존재들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비루먹은 개 한마리가 아무 살점도 없는 뼈다귀를 딱딱 물고 있지 않은가? ‘아, 저 개도 중생인데 불성이 있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스승에게 던졌고, 조주선사는 '없다'고 한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스승의 말씀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부처님은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면 스승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아, 그렇군요'라고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되니까 말이다.

화두는 생명이라고 한다. 놓치면 안 된다고 하니 경전 외듯 외우는 버릇이 곁에 머물기는 하지만 ‘개의 불성과 딜레마’처럼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조사들의 치열한 자기 정진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만들어 왔다.

앞서 성인의 경지에 들게 되는 ‘환희’에 대해 언급했지만 알듯 모를 듯 하다. 안다고 한들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짐작컨대 붓다의 열반 이래 지금까지 그 말씀과 정신을 이어온 역대조사들의 공안타파가 ‘환희’련가?


달팽이와 정법안장

붓다의 입멸 후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다양한 해석이 나왔을것이다. 붓다 이후의 역사를 봐도 여러 계파의 갈라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듯 적어놓은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들의 주장과 싸움은 암투로 이어졌을게다. 지금도 ‘스님들의 싸움’이 있고 그 명분은 정법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거다. 붓다의 진실한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한 인고의 세월을 잇고, 정법의 가르침을 담아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왔던 여정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그리고 팔을 잘라 구도의 정열을 보였던 혜가에게 그 법을 전하던 것이 ‘환희’일까. 육조에 이르러 다시 동쪽으로 법의 맥을 이어온 것이 거친 산야와 바다에서 기별을 얻은 ‘환희’일까. 저마다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기쁨과 슬픔, 외아들을 잃은 어미의 저미는 마음마저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안을 수 있다면 진정 붓다의 정법안장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붓다에서 마하가섭에게, 또 달마에서 육조혜능까지, 다시 한반도의 조사들에 이르러 오늘까지 그들의 법을 전하는 소리없는 사자후는 아마도 달팽이의 걸음만큼이나 더디게 걸렸으리라. 박영숙․이문선 작가는 정법안장의 눈빛의 무게와 속도를 달팽이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옛 부처의 침묵

이천 육백여년 전 보드가야의 새벽별을 보며 얻은 ‘붓다의 환희’를 지금 여기 우매한 중생이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침이 없는 그 길을 알아차리고, 다시 연관과 조화의 자연생태 속에서 함께 수행하던 도반들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전했을때 그 기쁨은 얼마만큼 컸을까. 맨발로 걷고, 밥을 빌고, 계절따라 안거를 지내면서 살폈던 들숨과 날숨, 법을 설하여 아픈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안내했던 그때의 고요는 얼마나 깊었을까. 가섭존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면서 조금의 설레임과 떨림이 없었던가.

이 모든 것에 옛 부처는 침묵만 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발딛고 선 이 땅에서 내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오직 나’만의 소리가 있었던가. 남의 소리를 흉내내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제대로 된 나의 소리와 나의 내면의 눈을 의식했던 적 있던가. 옛 부처의 침묵에 이어 지금 나의 소리를 확인하고 소리칠 수 있다면 진정 ‘환희의 땅’을 만나리라.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핀 국화꽃

진정 수행자의 환희심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검은 암흑의 땅에 비록 황금색 깨달음의 빛이 온천지를 번져온다고 할지라도 이 생을 마치고 새 삶을 시작할 즈음에 만날 수 있는 것이 ‘환희지’의 경지란 말인가. 깊어가는 가을에 조용히 국화꽃은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말없이 허공에 떠 있다.

박영숙․이문선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서 많은 말을 토해내듯 어루만졌다. 온갖 주제를 끌어다가, 더 많은 생명을 부여잡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공존’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환희지’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욕망과 절제라는 이분법의 눈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았다. 나는 이 작품에서 삼라만상의 실상을 깨친다면 모두가 하나일진데 굳이 여러 개를 나열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이(不二)의 실상을 머리로만 알았지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심플하게 하나만 두고 <통(通)>을 외치던지, 더 많은 생명들을 끌어다가 <다양성(多樣性)>을 논하던지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던 것이 못내 미안하기만 하다. 공존과 연기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작가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속에서 만나는 ‘환희의 땅’에서 보살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게다.

붓다의 입멸이후 그렇게도 그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모형을 조각하고 황금빛으로 마무리했던 것이 바로 ‘환희의 땅’에서 만나는 새로운 붓다이기를 열망했던 이유다. 박영숙․이문선 작가는 이번 미니갤러리 수익금을 ‘정토수련원’에 기부하자고 한다. 이것은 정토수련원에서 진행하는 ‘깨달음의 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다시 ‘환희의 땅’에서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 박석동(http://ecodo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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