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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미니갤러리 8번째 : 물과 바람의 노래



날씨가 꽁꽁 얼어붙었다가 좀 풀렸다가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점심때는 어디 좋은 볕이라도 없나 하고 어슬렁거리게 됩니다. 독감이 유행이던데 건강들은 괜찮으신지요?
한 점의 작품으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어가는 미니갤러리 여덟 번째 전시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물과 바람의 노래>입니다. 한여름도 아닌데 물과 바람타령 한다고 타박하지는 마세요. 여름 볕에 그늘 드리워진 물도 아니고, 봄날 꽃잎에 사랑실어 보내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도 아닙니다. 겨울 시린 물 그대로입니다.
항상 다른 장르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문선작가의 이번 작품은 디지털그래픽 작품입니다.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을 통해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법어(法語)입니다. 휘몰아치는 물길위에 바람이 속삭이는 것에 귀기울여봅니다. 우리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자는 서원의 몸짓을 읽게 됩니다.
<행복한책방>에서 열리는 미니갤러리는 <에코동의 서재>, <법보신문>, <휴심정>, <한겨레출판>, <시공사>, <김영사>, <희망플래너>가 공동주최합니다. 새로운 기부프로그램 <미니갤러리>에 여러분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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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 : 여덟 번째 미니갤러리  - 물과 바람의 노래 展
◈ 일시 : 2012년 2월 21일(화) ~ 3월 12일(월) 오전 9:30 ~ 오후 6:00
※ 2월 21일(화) 오후3: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 전시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주최 : 행복한 책방, 법보신문,에코동의 서재, 휴심정, 한겨레출판, 시공사, 김영사, 희망플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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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바람의 노래> 118cmX70cm, C-print, 박영숙,이문선, 2012 행복한책방


>> 에코동의 사진소개

요즘 사회는 ‘소통’이 화제다.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산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누구와 어떻게 소통하며 지내는지 자세히 모른 채 살아간다. 그동안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세상을 향한 외침을 거침없이 쏟아내었지만 소통은 그것을 받아 챙기는 자의 몫이라는 걸 안다. 그림과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니갤러리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는 다른 편에 서서 받아 챙기는 자의 몫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번 작품도 작가의 시선이라기보다 보는 이의 감성에 기반을 두고 바라보았다.

이번 작품은 숨 가쁘다. 가만히 들여다보기 전에 뭔가 대책을 마련하거나 재바르게 몸을 숨겨야 할 것 같다.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쓰나미’를 보여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의 침공’이 심경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여기서는 휘몰아치는 폭풍같은 물길의 위협보다 ‘물’이 갖고 있는 평화에 대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이번 작품은 ‘물과 바람의 폭풍’이 아니라 <물과 바람의 노래>라는 간지러운 이름을 붙였다.


1. 물과 바람의 생명과 평화

거대한 물줄기는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 같다. 누가 마주할 수 있을까? 숨 가쁘고 긴장의 순간에 퍼뜩 스쳐가는 한 생각은 ‘천천히 들여다보고 그 깊은 속내를 알아차리고 싶은 내 욕심’이다.  그 욕심과 긴장이 충돌하는 내 안의 분별을 알아차렸다.
먹물 흘려 굵은 붓으로 거칠게 움직여 만들어낸 것 같은 <물과 바람의 노래>에서 물과 바람은 쉽게 만날 수 없다. 가만히 눈 감고 서 있으면 손등에 살짝 내려앉았다 지나가는 간지러운 바람도 아니고, 종이배 가라앉지 않고 출렁이며 졸졸 흐르는 그런 평온한 물도 아니다.

<물과 바람의 노래>에서 그런 평온한 물과 바람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외향적으로 보여지는 것에서 물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직접 마주한 작품의 안으로 흐르는 물의 고요와 평화마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직접 대면하고서도 평화의 물과 바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례다. 가은에 있는 정토수련원에 마음을 맑히는 집들이 들어 설 때 어딘가에 작은 연못 같은 호수라도 하나 있었으면 싶었다. 한쪽 구석에 나무도 한 그루 서 있어 그늘도 조금 내어주면 더 좋겠다 싶었다. 이 말을 버릇처럼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물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로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물이 밀려왔다가 거품들과 함께 모래 속으로 스며들듯 물러나고 다시 하얀 포말을 끌고 힘겹게 다가왔다가 뒤에서 끄집어 당기는 뭔가의 힘에 물러나기를 하루 종일 반복하고 있어도 지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또한 지치지 않는다. 한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바위틈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가는 가는 물줄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기억때문인지 마당 한편에 물 담은 연못하나 있었으면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잔잔한 물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로움을 잊을 수 없었다.

물이 움직이는 자리에는 분명 보이지 않지만 바람을 느낀다. 물은 바람을 데리고 다니고 바람은 물위를 따라 다닌다. 바람은 물 위를 흐르면서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다시 물을 뿌리고 나무를 키운다. 온갖 생명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목숨줄을 연명하고 있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다른 생명체에 기대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2. 보현보살의 노래

우리는 다른 생명체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거의 못느낀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쓰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행복의 끝을 향해 달리는 것 마냥 옆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먹을 것이 남아서 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집을 한 채 더 갖고 있어도 집이 없는 사람을 위해 내어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인간의 다양한 삶의 군상들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짓는 것은 결국 자기 몫이다.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 발견을 통해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 매개가 바로 원(願)이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희망세상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 그림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원(願)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 속에서 우리 스스로 대견해하며 칭찬하기도 하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작은 노력에서부터 세상을 뒤집어 놓을 큰 계획을 세우기까지 우리들 각자의 서원(誓願)은 다양하고 많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려는 우리들의 염원과 행동은 결코 크기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선행을 실천하겠다는 것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거대한 움직임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큰 원이고, 어느 것이 작고 소심한 것이라고 판단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세운 서원(誓願)의 실현을 위해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관건이다.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참구할 때,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주린 사람이 밥을 찾듯이, 목 마른이가 물 찾듯이 하라는 말씀이 있다.

원(願)과 욕심의 차이는 무엇일까? 옛 스승은 우리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야만 절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던 오늘과 내일의 과제가 되던 우리의 서원은 욕심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원을 지닌 사람은
그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좌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욕심을 지닌 사람은
한 번 넘어지면 좌절해서
다시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 법륜스님의 말씀 중에서 -

개인의 원(願)과 실현을 위한 노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과 바람의 노래>가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고, 작가가 행을 통한 깨우침으로 우리들에게 웅변하는 ‘보현보살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깊고 웅장하며 거대한 힘이 실린 물은 바람과 함께 거침없이 쏟아지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물은 바람을 넘지 못하고 바람은 물을 내치지 못하며 서로 다르게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대자연의 힘에서 원(願)을 이루려는 의지가 보인다.

작가는 대자연의 힘, 원력보살의 힘을 작품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물과 바람의 노래>는 옛 스승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있다. 굵은 먹선 같은 거친 획은 거친 한지의 표면위에서 오히려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


3. 동양화풍의 디지털그래픽

이번 작품 <물과 바람의 노래>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다. 한지위에 펼쳐져 있다고는 하나 큰 붓에 먹물을 가득 묻혀서 찍어 눌러 그린 그림은 아니다. 작품에서 쓰인 색깔이 먹을 연상케 하는 검은 색과 흰색밖에 없다.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말하는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서 작품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든다.

미니갤러리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사진’이다. 이 말을 되새기듯 하는 것은 미니갤러리의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진이 아니라 ‘손을 댄’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장을 포착한 중요한 증거자료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거기에 손을 댄 흔적이 많은 ‘디지털 그래픽’ 작품이라는 말이다.

디지털 콜라주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물과 바람의 노래>는 엄밀히 말해 콜라주는 아니다. 여러 작품이 아니라 한 작품과 작가의 열정만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과 바람의 노래>는 작품성을 넘어 한국에서 시도되는 디지털그래픽의 새로운 영역이라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진이냐 그림이냐를 구분하려 들면서 그림 속에서 사진을 찾으려 하고, 사진 속에서 그림을 찾으려 하고 있다.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 선 작품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흡수하듯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작가와 호흡할 수 있고, 그것으로 작가는 세상과 교감할 수 있다.


4. 역동적 움직임속에 고요를 발견하다.

<물과 바람의 노래>에는 ‘물과 바람’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의 강약으로 작가의 감정까지 이입시키고 있고, 여백을 충분히 두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먹색의 농담으로 여백을 만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동양화의 기풍을 한껏 살리고 있다고 추켜세우고 싶다. 여기에다가 흑과 백의 여운만으로 역동적인 물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비전문가로서의 자책과 함께 작품을 이해하고 느낌을 정리해 오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킨 것은 작품에 대한 몰입이다. 몰입은 작품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과 바람의 노래>에서 물길 위에 바람을 보았고, 물 아래 어긋지게 놓인 바위들도 보았다. 어긋지게 놓인 바윗돌을 넘어 물은 새 길을 열었고, 그 길에 바람과 함께했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그대로 나에게 덮치는 듯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 아래의 평화로움에 젖어든다. 물살은 급하게 흐르는 듯하지만 물 아래 맑은 고요가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본다. 발을 담그고 서 있노라면 장단지를 지나가는 물살은 다리를 간질이지만 물아래 발바닥 가까이는 깊은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내 안에 잠자는 고요를 끌어내고 나와 살 맞대고 살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따뜻한 미소 한 번 보내는 것에서 출발하는 사회의 변화,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를 꿈꾼다.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서원과 정진이 필요하다. <물과 바람의 노래>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 내면의 절규를 그대로 받아 안을 서원과 그 원을 실현시킬 정진을 말하고 있다. 참회와 서원, 정진으로 이어지는 보현보살의 행을 물과 바람이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