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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4차 미니갤러리 : 장관

<행복한 책방>이 주최하는 네 번째 전시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여름이 저만치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윤여준 전장관의 모습을 담은 인물사진입니다. 작품의 특징은 대부분의 검정색으로 표현된 어두운 사진으로 주위환경에 묻혀 구분이 모호합니다. 작가와 대상만이 알 수 있는 선문답같은 사진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상상력을 입혀 마음 편하게 들여다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담아내는 리얼리즘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는 감성주의의 절묘한 배치가 유효한 이번 작품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책방>에서 열리는 미니갤러리는 <에코동의 서재>와 <법보신문>이 함께 진행합니다. 이곳에서는 사진과 더불어 리뷰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회의 판매수익금은 윤여준 전장관이 활동하고 있는 평화재단의 활동기금으로 기부될 예정입니다.

2011.8.30 ▶ 9.20
◈ 전시명 : 미니갤러리 네 번째 - 장:관(壯觀) 展
◈ 일시 : 2011년 8월 30일(화) ~ 9월 20일(화) 오전 9:30 ~ 오후 6:00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 전시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공동주최 : 행복한 책방 ․ 에코동의 서재 ․ 법보신문
※ 8월 30일 오후3: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관(壯觀)> 118X65cm, C-print, 박영숙․이문선, 2011 행복한책방

인물사진의 리얼리즘과 감성주의가 전하는 가르침, 겸손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고,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여름은 여름답지 않고, 겨울은 겨울답지 않다. 그렇다고 여름이 덥지 않고 겨울마냥 그렇고, 겨울이 여름마냥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어릴 적 산골에서 지냈던 그 여름과 겨울 같지 않다는 말이다. 여름 날씨가 전과 달라 아열대기후로 변했다는 둥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만, 덥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미니갤러리가 네 번째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사진 한 컷을 걸어두고 깊이 감상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휘리릭 보고 지나칠 장면들이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색하고 사유해보고자 함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오면서 작품들은 각각 다른 느낌들을 전해주었다. 새벽풍경, 그림 같은 사진, 급기야 누드사진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물사진이다.

인물사진이라는 처음 제안에 반대부터 했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사유와 사색을 통해 내면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보고자 함이 궁극의 목적일진데 작품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대상의 존재 자체에 압도되어 주눅 들거나 사적 감정에 빠져 감정이입의 치우침을 경계했던 것이다. 아니면 그것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인물이 대상화되어 교감이 사라진 죽은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온갖 생각들은 번뇌였고 기우였다. 뭔가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는 의무감만 내려놓는다면 충분히 편안한 사진이다. 어둠 같은 검정색이 대부분인 이 작품은 편안함과 시원함, 거기다가 느긋함까지 주고 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초상화는 작가에 의하여 복잡하게 표현된 모델”이라고 했다. 이문선 작가는 입버릇처럼 “사진은 단순한 재현(representation)일뿐 아니라 제시(presentation)”라고 말해왔다. ‘재현’은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면 ‘제시’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너무도 단순해 보이는 이 사진은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없고, 색깔은 검정과 흰색밖에 없다. 단순하게 보이는 ‘재현’을 넘어 작가는 무엇을 복잡하게 표현하고 ‘제시’하는 것일까? 이 짧은 물음이 화두가 되어 사진 속으로 안내했다.


이 사진에서 재현(Representation)하고 있는 것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가가 ‘재현’한 부분들을 먼저 들여다 보려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누가 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윤곽선이 불분명해 주위 환경과 섞여버린 부분들은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며 새롭게 그린다. 작가의 의도를 상상한다지만 분명 나의 좁은 경험세계에 갇혀서 풍부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는 일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다.

1) 밀짚모자

밀짚모자의 넓은 챙은 숨겨져 보이지 않지만 살짝 들어 올려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다. 유난히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땀이 젖어 있고 입을 모아 내뱉는 숨은 뜨겁다. 밀짚모자의 넓은 챙은 뜨거운 햇빛을 살짝 가려주지만 더위까지 막아주지는 못하고 있다. 여름을 알고 더위를 아는 그가 밀짚모자를 눌러쓴 것은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농부였다. 그 농부의 밀짚모자는 단순히 햇빛가리개가 아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친 옷과 함께 밀짚모자는 농부 그 자체였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살아간다. 부귀영화,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 높은 위치에 서려고 애쓴다. 타인을 밟고서라도 올라서려고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 에 어울리는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은 맞춤 교육을 하고, 그러한 대학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고등학교의 교육시스템은 발맞추기 바쁘다. 사회구조와 문화를 보지 못하고 개인의 심성만 탓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상승과 성장의 일변도로 달려가는 지위향상의 삶은 무한히 계속되지 않는다. 젊어서는 승진과 연봉을 위해서 목을 매듯 앞만 보고 달리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 성찰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 그러한 성찰과 내면화는 목적지향의 삶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연륜이라는 가르침과 희망을 주는 것 같다. 연륜이라는 도덕적 가치는 스스로의 우월감을 포기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사회구조와 문화의 부조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밀짚모자가 지위향상의 삶에서 목적지향의 삶으로 전환된 한 인간의 연륜을 표현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2) 옷과 시계

더운 날씨에 얼굴의 굵은 주름사이에 배어있는 땀과 목줄기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차라리 살아있는 증거다. 듬성듬성 풀들이 자라고 있지만 땅이 되받아 품어내는 열기는 천 년의 세월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거친 질감의 긴팔 윗도리는 뜨거운 햇살을 살짝 막아내지만 몽골의 말발굽을 피하지는 못한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주의 황룡사지 넓은 터에 앉아 입술을 다물었다. 콧속으로 들어온 바람은 몸속의 열기를 더한 더운 바람으로 나간다. 평소에 사람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던 것이 눈가의 주름을 만들고 그 골을 따라 땀이 흘러 눈가를 어지럽힌다. 손으로 한 번 쓰윽 훔쳐내면 될 것을 천 년 역사의 아픔을 사유하듯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대신했다.

함께 순례하던 사람들 붙잡으며 같이 가자고 불러도 되건만,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싶어 그냥 주저앉은 곳이 황룡사터다. 얼굴햇빛은 밀짚모자로 가렸고,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은 긴팔 옷으로 가렸다지만, 편하게 앉은 무릎위에 얹어놓은 손등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또 천 년의 시간은 멍애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상징이라도 하듯 손목을 감고 있는 시계는 무겁다.

거친 질감의 옷과 무거운 시계는 유일하게 대상과 작가가 소통하는 소재일 것이다. 일종의 작가와 대상만이 인식할 수 있는 선문답이다.

3) 땅과 풀

천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수행과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법열을 그대로 이어 지금 여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사원 유적, 황룡사지. 봄과 여름을 맞이하고 가을, 겨울을 기다리는 이 땅과 풀들은 신라 진흥왕때에도, 다시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 고종 때에도 황룡사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날의 더위에 땅은 메말랐고, 풀은 낮게 엎드렸다. 붓다가 6년 고행을 마치고 대결정심으로 앉은 깨달음 직전의 길상초가 이랬을까? 흙과 풀과 사람은 제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 들숨과 날숨으로 하나의 생명임을 일깨우는 시간이고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 사진에서 제시(Presentation)하고 있는 것들

다시, 이 사진에서 제시(Presentation)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있지만 없는 것들, 없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제시(Presentation)다. 즉 숨어 있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작가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예술 이전의 기술에 불과했을 것이다.

1) 인간 윤여준

처음 ‘인물사진’이라고 했을 때, 반대부터 한 이유다. 사적감정에 빠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존재 자체를 부각하려는 사적감정을 억누르다가 다시 이번에는 단순화, 대상화, 정물화로 흘러 생명을 놓쳐버릴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여준(尹汝雋), 그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그의 경력이다. 기자생활을 했고, 환경부장관도 했고, 국회의원도 했다. 그후 정치인으로서 범보수의 제갈량, 한나라당의 전략통, 대한민국의 장자방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지금은 또 민간단체인 평화재단, 합천 평화의 집 등에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장관(長官)이라고 부른다. 윤여준 전장관, 환경부장관도 1997년 8월 6일에 취임해서 이듬해 3월 3일까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역임했다. 왜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장관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를 뿐이다.

그를 잘 알거나 잘 몰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분명하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물론 그 평가는 시비를 넘어 개인의 이념적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 등의 이념적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청춘콘서트에서 안철수교수는 “이제는 상식과 비상식의 시대”라고 선언한 바 있다. 진보측에서 비판하는 내용은 과거 보수정당의 장자방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전략가 역할을 했던 것, 그로 인한 한국사회의 질곡이 마치 그의 작품인양 몰아붙이는 것이다. 또 보수측에서 비판하는 내용도 있다. 진보진영의 전유물이었던 <평화>와 <소수자 인권>문제의 중심에 있다며 보수정당의 장자방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작설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물론 이념적 잣대를 걷어내고 들어보면 ‘상식적’인 범주에 속하는데 말이다.

직접 만나거나 직접 가 보아야만 사람을 알고 그 지역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지 않고 사람을 이해한다거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윤여준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언론속의 인물이었고, 개인의 사상적 범주에서 평가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면 달라진다. 처음에는 연세드신 어른을 만나는 자리인지라 긴장을 하지만, 사람좋은 웃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킨다. 또 그의 겸손함은 절로 고개숙이게 만든다.

<남자삼대교류사>(2010, 메디치)라는 작은 책을 읽어보면 원로 정치인 윤여준을 만나 인터뷰하다가 집안 내력에 대한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 그것만 모아 만든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소론의 영수’로 불리는 윤증(1629~1714)을 소개하고 있다. 윤여준은 그 분의 자손이라며 말이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 속에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왔고, 받았던 가르침을 다시 아들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식교육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또는 2~3년간에 끝날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쉽지 않은 일들이다. 끝없는 ‘기다림’으로 시간이 만들고 다듬어야 하는 여정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참 부럽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되어있는 지인들에게 책을 보낸다.

그를 만나서 정치이야기, 사회이야기, 미래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이야기, 즉 밥먹는 이야기, 옷입는 이야기 등을 나눠보면 ‘인간 윤여준’을 더욱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을 입는 것을 보면 그의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또 음식에 대해서도 미각이 뛰어난 것과 더불어 음식을 담는 그릇에 대한 미학이 철저하다.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슬쩍 물어본다. 자식교육에 특별했던 부모님들에게서 배운것이냐고?

그의 개인적인 삶의 괘적과 이념적 철학 등에 대해서 깊이있지는 않지만 슬쩍 엿보며 길게 말하는 것은 ‘인간 윤여준’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 이 작품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서 이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암시하듯 보여주려고 했을까? 1차원적인 ‘이해하기와 바라보기’의 영역에서 <인간 윤여준>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2) 수행자 윤여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직접 만나고서는 그의 겸손함에 놀라고, 그래서 좋아하고 나중에는 존경하게 된다. 그것은 ‘겸손함’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삼대교류사>를 읽어보면 옛날 훌륭한 조상으로부터 가르침을 잘 받아왔고, 다시 자식들에게 훌륭한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런데 <인간 윤여준>을 만나본 사람은 아마도 이 책을 감동스럽게 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책속의 이야기는 단순히 ‘옳은 말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 윤여준>을 여실히 잘 말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말씀’과 ‘실제의 삶’이 유리되지 않고 그 내용그대로 몸소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사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기성세대들은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경주를 순례하는 그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는 뜨거운 햇살에 대한 부담이 아니라 천 년 세월을 그대로 이어온 이 땅의 숨결에 온 마음을 실었기 때문이다.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불교문화의 꽃이다. 나는 가만히 2천 6백여 년 전에 길 위에 앉았을 붓다의 형상을 그리며 이 곳 메마른 황룡사지에 앉았다. 작가의 시선은 <인간 윤여준>에 머물고 있지 않다.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을 모셔 담듯 조심스럽게 그의 형상을 담았고, 반측면의 시선으로 돌렸다.

앞서 <인간 윤여준>을 이야기하며 ‘겸손’한 그의 일상을 말했던 것이 작가의 시선에서도 함께 느껴진다. 대웅전에 높이 앉아 있는 붓다의 형상을 흉내 내기보다 더욱 겸손한 표정 그대로 살짝 돌아 앉아 있는 것이다. 삶의 연륜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겸손함’은 내면의 ‘비움’을 바탕으로 ‘낮아짐’이 있어야 하고, 다시 ‘섬김’의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붓다와 예수가 몸소 보여주며 실천하면서 가르침을 폈던 내용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수행자 윤여준>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감상할 때 정면보다는 살짝 돌아서 반측면의 모습이 훨씬 감동이 있다고 이야기들 한다. 깊이 팬 이마의 주름과 눈가의 주름, 다시 얼굴과 손등에 선처럼 그어진 주름살 사이로 땀이 배어 흘러내리지만 눈을 질끈 감고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는 명상은 일상의 모습일 게다. <수행자 윤여준>은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제시하고픈 대목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일상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대상과 작가의 미묘한 선문답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3) 시민 윤여준

<인간 윤여준>과 <수행자 윤여준>은 우리들에게 ‘겸손함’을 전해주고 있다. 그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고,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수행자 윤여준>의 ‘겸손함’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만든다. 변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수행자 법륜스님’에 대해 종종 말한다. 수행자의 ‘깨어 있음’이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운동은 구호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마치 그의 오랜 세월 속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세상변화의 철학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민운동가의 기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사람의 도리, 아버지에게 배운 생활의 지혜는 그를 약삭빠른 아첨꾼으로 키우지 않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기운을 가지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면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그 파편적 시간들을 쪼개진 기왓장 맞추듯 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삶만 들여다보고 묻어두지도 않았다.

그의 삶의 질곡들 가운데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결과적 사건들을 되짚으며 그의 사상과 이념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보-보수로 나누든, 좌-우로 나누든 선을 긋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반도는 이념적 대립 속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갈등하고 반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이념’이고 ‘사상’이고 ‘명분’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라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굶어보지 않은 배부른 소리다.

지금 여기서 사상가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념논쟁 뒤에 합리성을 바탕으로 상식적 활동을 펼치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윤여준을 말하기 위함이다. 자신을 내면화하여 ‘겸손함’으로 무장하고, 사람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고, 나라를 경영할 지혜를 기르고, 세상을 바꾸는 여정이 ‘시민’의 역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를 살짝 비켜서 바라보는 것으로 <시민 윤여준>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던지는 것으로 미래비전을 보여주는 우리사회의 ‘어른’으로 위치하면서, 또 그 방법론의 하나로 ‘시민’의 역할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구호와 주장에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역할을 다할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침묵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4) 철학자 윤여준

이 작품의 대부분의 색은 검정의 어둠이다. 초상이기는 하지만 얼굴은 묻혔고, 인물을 나타낸다지만 고요를 담았다. <시민 윤여준>을 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여기서 멈췄을까?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자세는 미래지향적이다. 과거에 얽매여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삶을 미래로 끌고 있다. 미래를 응시하는 그의 자세는 그의 삶을 통해 인생관, 세계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의 사회참여운동과 시민운동가의 수행은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토대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그의 시선을 통해 느낄 수 있고,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혼자 가는 열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이 가는 한 걸음을 택한 <시민 윤여준>은 다시 세상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펴고 있다. 천 년의 세월의 한(恨)을 어떻게 풀고, 매듭지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백년 안팎의 인생에서 시비를 가리는 속 좁은 편견의 리더가 아니라 과거 천 년의 역사를 통해 다시 미래 천 년의 역사를 통찰하는 가르침이다.

작가는 그의 철학적 세계를 어둠으로 표현한 것 같다. 어둠은 절대 신성의 영역을 만들고 그 신성의 영예로움이 다시 철학적 바탕을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 정치와 경제, 역사와 문화 등은 생겨나고 변화해 간다. 그 가치체계를 시비할 수는 없지만 미래지향적 방향 제시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사회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철학자 윤여준>을 원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작가는 대부분의 빛깔인 검정색의 어둠을 통해 <철학자 윤여준>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장관이다!

이번 작품 <장:관(壯觀)>은 한 인물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가 먼저 말을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평소에 그를 지켜보아 온 눈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대상이 된 인물에 대한 개인적 의견과 감상을 중심으로 하는 서술이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이고, 정치인이고, 선생님이고, 사회운동가이고,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수행자이기도 하다. 밀짚모자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목적 지향적 삶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하심(下心)’하는 수행자의 모습이고 이미 깨달은 사람이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대상이 된 인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덧붙이는 것이 다소 부담이기는 하지만 이 글의 특징이 느낌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글쓰기이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 말장난에 가깝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제목을 붙이는데 여러 날의 시간이 걸렸다. ‘언어’는 사람들과의 약속인 동시에 분석하게되는 요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을 어떻게 붙일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최종적으로 <장관>이라고 붙였을 때, 그 이름이 ‘장관’이지 이 작품에서 ‘장관’의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물을 표현한 작품, 초상의 경우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담고 표현하는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고, 다시 흑과 백으로 처리하거나 선으로 표현하는 등의 감성주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문선 작가는 미묘하게 이 두 가지 영역의 줄타기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 ‘장관’에 한자를 덧붙여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어지는 순간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번에 눈치 챌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박석동(http://ecodo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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