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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미니갤러리 리뷰] 제주할망의 하안거


한 컷의 사진으로 삶을 치유하는 미니갤러리 세 번째 전시회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 전시명 : 미니갤러리 세 번째 - 제주할망의 하안거 展
◈ 일시 : 2011년 7월 1일(금) ~ 8월 5일(금) 오전 9:30 ~ 오후 6:00
※ 7월 1일 오후3:00 오프닝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 전시 : 인터넷법보신문 (http://www.beopbo.com)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주최 : 행복한 책방 ․ 에코동의 서재 ․ 법보신문




미니갤러리를 준비하고 사진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지 벌써 세 번째 작품이다. 그동안 이문선 박영숙 부부작가의 작품세계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차원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고, ‘이해’하는 차원에서 마음나누기하듯 글을 써 왔다. 첫 번째의 작품 『자작나무 숲』은 사실적 사진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대게 우리들이 ‘사진’이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위치한 작품이다. 쉽게 말해 ‘사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두 번째의 작품 『봄날 인왕산』은 ‘시뮬라크르’라는 다소 생소한 기법의 사진이다. 이것은 ‘사진적 사진’을 넘어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사람들은 ‘자작나무 숲이 어디 있지?’라며 자작나무를 찾았다면, 두 번째 작품에서는 ‘인왕산’의 실체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반추하는 작품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기란 참으로 힘들었다.

이렇듯 이문선 박영숙 부부작가의 작품세계는 두 작품만으로도 서로 다른 기법으로 그들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에 대해서 뭔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가는 순간, 벌써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그래서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다.

세 번째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이렇게 사설이 긴 것은 두 작품만큼이나 이번 작품도 그 깊이가 오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작품이 전시되고 다음 작품에 대해 기획할 때 ‘이번에는 누드다’라고 했다. 절집안 가까이서 터부시되어 왔고, ‘예술’이라고 말하기 전에  수행자의 번뇌 속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영역이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인줄 알았다.

워낙에 이문선작가의 경우에는 ‘누드’의 예술성이 어디서든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금기시하는 것 자체가 ‘수행’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작가의 주장 앞에 나는 관념의 철학과 실제의 생활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세계라고 수긍대신 변명했다. 그런데 ‘누드’라는 작품을 보여줬을 때는 다소 ‘실망’했다. 백배 양보해서 ‘누드’를 ‘예술성’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상상하며 거기에 새로운 철학을 형형색색 입혀보려고 했던 처음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드작품’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누드 같은 작품’이었다. 여러 번의 노골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그것이 정말 ‘누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존재 자체가 무겁게 다가왔다. 두 번째의 작품 『봄날 인왕산』에서 인왕산을 찾으려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동안의 고정관념과 경험세계에 대해 얼마나 닫혀 있었는가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의 작품에서 ‘자작나무’를 제목에 붙여놓아 사람들이 ‘자작나무’를 찾는 수고로움이 두 번째의 작품으로 이어져 ‘인왕산’의 골짜기를 만들었다. 보는 이의 경험세계의 폭과 깊이만큼 보인다는 말로 상상의 넓이를 무한 확대하려고 한 점도 있지만, 고정관념에 안주하려는 또 다른 태도를 열린마음으로 그냥 봐주지 못하고 막은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 세 번째의 작품은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제주할망의 하안거』이다. 왜 뜬금없이 ‘제주할망’이며, 여름철 절 밖을 나서지 않고 오로지 앉아서 수행을 했던 ‘하안거’인가? 여기에 답할 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그림같은 사진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1) 선재동자와 산티아고가 걸어간 길

선재동자의 구도행을 그린 불교경전 『화엄경』과 양치기 산티아고가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닮아 있다. 아마도 선재동자와 산티아고의 나이도 엇비슷해 보인다. 그들이 진정 구하고 자하는 도(道)와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처음부터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것은 세속적인 욕망이 묻어있는 ‘보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화엄경』의 내용가운데 선재(善財)라는 소년이 차례로 53명의 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53명 중에는 법을 구하고 스승으로 삼을 만한 보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비구 ·비구니 ·소년 ·소녀 ·의사 ·뱃사공 ·신 ·선인 ·외도(外道) ·바라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구도의 여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는 것은 구도의 과정에서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그 기나긴 여정은 순탄하고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청년 산티아고는 어떠했는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찾아 가기로 결심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그 여정에서 집시 여인과 늙은 왕을 만나서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고, 도둑을 만나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여정을 만들었다. 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훗날을 기약하기도 하고, 사막에서 죽음의 문 앞에 이르기도 하였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도 끌리지만, 꿈을 계속 쫓아가라는 연금술사의 충고를 따라 마침내 '자신의 보물'을 찾게 된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데 선재동자와 산티아고가 자신의 울림에 귀 기울이면서 스스로의 보물을 찾아 나선 여행길은 어떠했을까? 선재동자와 산티아고를 동일시하며 그들의 구도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험난하고 극적인 여정 속에서 ‘자아의 신화’를 찾은 그 길을 따라가 봄이다. 그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물을 마시고, 잠은 어디에서 잤을까?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힘들고 지칠 때 스스로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고, 그대로 따라 걷고 싶어서다.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이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관광객이 어떤 목가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박하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해변 모래 위로 밀려오는 파도에 흔들리는 낚싯배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찰칵 누르자 그 어부가 잠에서 깨어났다. 관광객은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바다에는 고기도 많은데 왜 당신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더 잡아오지 않고 여기 이렇게 빈둥거리며 누워 있소?”
어부가 대답했다.
“내가 오늘 아침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고기를 잡았기 때문이죠.”
그러자 관광객이 말했다.
“그러나 이걸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하루에 서너 차례 바다에 출항한다면 서너 배는 더 많은 고기를 잡아올 수 있소.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있소?”
어부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한 일 년쯤 지나면 당신은 통통배 한 척을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2년만 고생하면 통통배를 하나 더 살 수 있게 되겠지요.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작은 선박 한두 척을 살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언젠가는 당신 소유의 냉동 공장이나 훈제 가공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될 테고, 결국에는 당신이 소유한 여러 척의 어선들을 진두지휘하여 물고기 떼를 추적할 헬기도 한 대 장만할 수 있게 되거나 아니면 당신이 잡은 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을 여러 대 살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어부가 물었다.
관광객은 의기양양하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조용히 멋진 해변에 앉아서 햇볕을 받으며 졸면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게 될 겁니다!”
그러자 어부가 관광객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었던 거잖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은 그 행복의 길을 찾아서 선재동자와 산티아고처럼 여행자가 되어 길 위에 서 있다. 아시아의 실크로드를 넘어 이집트에 이르는 사막의 길은 단지 뜨거운 태양과 모래만 있는 게 아니다. 밤이 되면 온갖 종류의 벌레와 추위가 있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목마름, 또 바람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단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머리로 의식하는 것을 넘어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꿈을 찾아서, 행복을 찾아서 여행의 길에 오른 나그네의 목마름은 철저하게 자신을 극한의 경지로 몰고 간다. 그 극한의 설정 속에서 외부환경이나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킬 수 있는 힘 - 해탈의 길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화쟁의 이념을 알려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경우에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무덤가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 전날 먹었던 해골바가지의 물은 달콤함이었고, 다음날 다시 발견한 해골바가지의 물은 ‘극한’의 상황이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힘으로 자유를 발견했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구정선사(九鼎禪師)의 극한 상황은 어떠했을까? 도를 구하기 위해 스승을 찾았을 때 젊은 구도자에게 솥을 걸게 하고, 정성을 다해 솥을 걸었건만 ‘이쪽은 필요 없으니 저쪽에 다시 걸어라’, ‘잘못 걸었으니 다시 걸어라’하며 청년은 매일 솥을 걸어야 했다. 이때 아홉 번째의 솥은 구정선사의 ‘극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은 선재동자와 산티아고가 찾아 나선 사막의 길이고, 다시 그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향한 발걸음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달빛 으스름한 그 사막의 한 가운데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고, 추위와 바람 속에서 육신의 허망함을 다시보고, 내면의 깊은 울림에 귀 기울이며 얕은 욕망을 걷어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그 사막의 한 가운데서 나아갈 바를 찾고 있다.


2) 사막과 오아시스의 생태학적 상상력

선재동자와 산티아고가 구도의 길을 걸었던 그 사막의 존재의미는 ‘공간적 개념’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무더운 날씨’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부족한 ‘찌는’ 더위속의 한 걸음은 허투루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간 참고 견디면 시원한 냉방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카페가 나올 것이라던가, 시원한 팥빙수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모를 일이지만, 팥빙수는 고사하고 강렬할 햇볕을 가려줄 그늘 한 자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는 그 ‘구도의 길’은 단순히 길이 아닌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결코 헛되이 걸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 평소에는 들을 수 없었고 알아차릴 수 없었던 내면 깊은 곳의 팔만사천번뇌와 맞닥뜨리는 수행의 공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주저앉아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싶지만, 되돌아 갈 길을 생각하면 더욱 아득하다. 간혹, 정말이지 아주 간혹 바람이라고 느낄 정도의 공기의 흐름이라도 감지할 때에는 눈이라도 감고 그 결속에 숨어 있는 냉기를 찾아 코를 벌름거릴지도 모른다. 오랜 가뭄에 단비라도 만난 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는 사람과 사람의 생명과 마음을 이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사막이 자기와의 힘겨운 싸움 속에서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고, 자기내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면, 이곳 오아이스는 그러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자연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막과 달리 물이 있고, 물이 있기에 나무가 있고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가 가능해지는 그런 공간이다.

오아시스는 사막 한가운데 낮은 웅덩이에 지하수가 솟아나와 물이 괸 것을 말한다. 그런 규모가 작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산티아고가 만난 오아시스는 부족 간 전쟁을 준비하는 완충지대로서 꽤 큰 마을의 규모를 이루고 살고 있는 넓은 오아시스다.
샘은 생명의 원천이다.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물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공기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사막의 한가운데서 물은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이 절박하다. 샘이 있는 오아시스는 사막을 건너는 무역과 이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군사적으로 오아시스는 무역로에 대한 지배로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산티아고가 사랑하게 된 여인을 만난 곳도 이 곳 사막의 오아시스다. 물웅덩이에 불과했을 오아시스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나무를 심고 농작물을 기르면서 초원지를 넓혀가고 공동의 노력으로 물을 보호하면서 각각의 개성을 지닌 민족문화를 만들고, 나아가 도시국가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또 이러한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지역들을 민족 간의 충돌과 전쟁으로 뺏고 뺏기는 전쟁 또한 일으키면서 생존의 삶터로 만들어갔을 것이다. 사막 한 가운데서의 전쟁을 준비하고 한 호흡 휴식하는 공간으로서의 마을인 오아시스는 평화로웠다.

생명의 원천인 샘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존재로서의 생명을 넘어 가치로서의 문화를 함께 품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 정치라고 하는 사람들 간의 존재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과 문화와 정치가 사막과 사막,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며 지금 여기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선재동자와 청년 산티아고가 만난 사람과 그들이 얻은 깨달음은 바로 숨이 훅훅 턱까지 차오르는 그 순간에 만난 오아시스의 생명이었으리라.


3) 곡선의 미학과 느림의 철학

아직 사막의 한가운데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재동자가 떠난 구도 여행의 끝과 청년 산티아고가 찾아 나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동일지역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막에서 얻은 ‘자신과의 대화법’은 스스로를 훨씬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오르고 내리며 내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의 느림의 철학에서 얻은 산물 일게다.

21세기는 정보의 시대, 속도의 시대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분명 고속열차의 속도가 자랑이 되고, 고속도로는 그물망처럼 편리하게 늘어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오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벌써 10년도 넘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의 오지 가운데 도로에서 가장 먼 곳이 30km가 안된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그렇다고 쳐도 국도는 어떤가? 구불구불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길은 80년대 비포장에서 포장도로로 바뀌고 다시 그것은 고속도로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곧게 펴고 넓어졌다. 마을을 지나는 국도는 마을을 양분하고, 다시 ‘속도’에 저해될까봐 육교를 설치한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계단 많은 육교를 오르고 내리기 싫어서 길을 건너다가 변을 당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이 많은 양반들이 교통질서를 어겨서 생긴 문제라고 책임을 모두 떠넘기기에는 뭔가 부족한 현실이다.

또 요즘 지능화된 육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아마도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또 검토한 결과이지, 세금을 낭비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게 아닐 것이라고 애써 양해하지만, 교통량이 적은 중소도시에도 너도나도 육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쉽게 양해가 되지 않는다. 연세 드신 분들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끔찍해서 돈이 많이 들지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고 혹여 항변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노인 분들을 생각해서 육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말고 신호등을 설치하고 횡당보도를 만들자고 말이다.

차를 운전해보면 알겠지만,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차 중심의 생각으로 바뀐다. 빨리 걸음을 옮기지 않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시대에 안전 감각이 없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매도된다. 속도를 줄이라며 길 가운데 요철을 만들어 둔 것은 짜증나는 일들이다. 내가 가는 길에 치워져야 할 대상,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고매한 ‘속도’를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다시 걷게 되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차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은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고, 돌과 풀과 꽃을 발견하고, 가게와 동네가 보인다. 이러한 것들이 속도를 늦춤으로 가능해지는 일이다.

요사이 들어 ‘곡선의 미학’과 ‘느림의 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속도와 수직상승만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 알았던 그동안의 삶에 대한 반성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꽃잎과 나뭇잎, 나비와 새의 날갯짓, 강물과 파도, 산과 구름 등 자연은 모든 것이 곡선이다. 곡선은 자연이고 직선은 인공이다. 직선은 우리의 심성마저도 파괴적이고 단일적으로 만들게 된다. 곡선의 미학은 ‘변화’를 꿈꾼다. 획일적인 단답형적인 삶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사막의 한 가운데서 숨이 턱턱 차오르지만 다시 한 밤의 열기는 급속도로 식어서 추위와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그 변화무쌍한 환경의 변화도 있겠지만, 남성에게는 페르몬 향기가 되고 여성들 사이에선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곡선의 흐름이다.

선재동자와 산티아고가 걸어간 저 사막의 능선들을 보라. 그들이 걸었을 한 걸음 한 걸음의 느림은 느긋함이 아니라 성찰이었다. 그리고 사막 능선의 곡선을 바라보며 그들이 얻은 것도 처음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하는 직선적 세계관이 아니라 순환의 세계관, 윤회적 세계관 속에서 연관과 조화를 깨달았을 것이다.


4) 경험의 선(線)과 실상의 선(禪)

선재동자와 청년 산티아고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을 저 능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다. 가슴과 엉덩이로 이어지는 육체적 곡선에서 느낄 수 있는 야릇함과 로망의 감성까지 자극하는 관능미는 결국 선(線)이다. 우리가 몸이나 사물을 인식할 때는 내면의 본질과 성질까지 꿰뚫어 들여다보기 보다는 먼저 기호학적인 라인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작가는 이 기호학적인 선(線)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마치 선재동자나 산티아고가 된 기분으로 사막의 한 복판에서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을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그 점으로서의 공간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선(線)을 이루고 바람이 쌓아올린 언덕은 다시 면(面)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멀고 가까이 빛은 굴절되어 신기루를 보이기도 하며 진실과 허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선재동자와 산티아고에게서 빠른 속도로 줌아웃(zoom out)된 영상은 개체화되고 분절적인 것들을 한데 모아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사막 한가운데의 선재동자와 산티아고는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실상의 본질을 꺼집어내는 것을 우리는 선(禪)이라고 한다. 즉,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나와 너의 경계를 넘나듦으로서 하나가 되고, 다시 그 가운데서 나와 너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열린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사막의 능선을 따라 이루어진 선(線)의 세계는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가는 집중력으로 피아간의 분별을 넘어선 선(禪)의 세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의 영역이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비록 사막 한가운데서 선재동자와 산티아고를 통해 현실세계를 인식하지만 작가 자신은 여기서 스스로 선(禪)의 세계로 넘나들면서 선(線)과 선(禪)을 동일시하는 깨달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의식세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의 경험세계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알음알이로 의식하는 등이 전부다.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얻은 결과물은 선(線)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線)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경험세계의 전부다. 하지만 의식세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실상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선(禪)으로 대표되었던 의식세계는 그 본질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실상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자유와 행복,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이 여정이 선(禪)이다.


5) 보살의 화현과 영성의 세계

선재동자와 산티아고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 아직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뜨거운 사막의 한가운데 말이다. 지금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서 기온은 급격히 내려가면서 추워질 것이다.

선재동자가 만난 53인의 선지식은 스승으로 삼을만한 보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선재동자는 모두 스승으로 삼았고 불보살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훌륭한 스승은 스승의 존재보다 훌륭한 스승으로 모시는데 있다'라는 말이 있다. 선재동자는 그렇게 스승으로 보시고 그가 만난 53인의 선지식을 불보살로 만든 것이다.

지금 어둠이 내리는 사막은 아직 열기를 품고 있고 조금 전에는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던 곳이다. 이 '공간'에서 새로운 '의식'을 발견하면서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의식세계를 확장하고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공간은 사막이 아니라 그 자체가 불보살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선(線)의 공간세계를 선(禪)으로 자기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주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주의 어느 마을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제주의 이런 저런 모습을 담다가 내친김에 할머니를 붙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동안 말을 듣더니 대뜸 한마디 던진다.
“몸이나 잘 다스려~ 허망한 몸이니께!”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를 한참 생각했다. 몸을 잘 다스리고 간수를 잘하라는 당부는 건강하게 살아라 뭐 대충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뒤에 오는 ‘허망한 몸’이라는 말과 연결이 쉽지 않았다. 또 거꾸로 바라보면, 세월 지나면서 몸은 영원하지 않고 말썽을 부리며 믿을게 못 된다는 의미인 것 같기는 한데, 잘 다스리라는 말이 먹먹하다.

80이 넘은 할머니의 입장에서 ‘몸’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돌아보니 육신은 집착할 것이 못 된다는 가르침일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라는 의미를 한참 지나 이 사진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공간을 만나고, 다시 의식세계로 확장시키며 선(禪)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누드를 통해 선을 만나고, 공간을 만나고, 새로운 의식세계에서 선(禪)을 찾았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세상의 전부이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아만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만났다. 깊은 사유와 사색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안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 거다. 또 제주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씀은 화두가 되어 우리의 삶 전체를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이 『제주할망의 하안거』라는 제목을 달게 된 이유다.

글 : 박석동(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ot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