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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리뷰] 서민적 삶의 굴곡을 담은 인왕산의 봄날을 노래하다!


◈ 전시명 : 미니갤러리 두번째 - 봄날 인왕산 展
◈ 일시 : 2011년 5월 27일(금) ~ 6월 30일(목) 오전 9:30 ~ 오후 6:00
5월 27일 오후5:00 오프닝기념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 장소 : 행복한 책방(02-587-8991) / 온라인전시 :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
◈ 주최 : 행복한 책방 ․ 에코동의 서재
◈ 후원 : 정토출판, 좋은벗들

[리뷰] 봄날 인왕산



서울의 지하철 3호선은 종로를 지나 인사동이 있는 안국동, 경복궁을 끼고 돌아 독립문, 무악재를 넘어 홍제를 지나간다. 그 안에는 경복궁이 있고, 그 뒤에는 청와대가 있다. 또 지하철이 크게 휘감아 돌아가는 곳이 인왕산이다. 높이는 338.2m라고 하지만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고 북악산(北岳山)과 연결된다. 조선시대, 또 그 이전에도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을 것이다. 이 산길을 따라 불광을 지나 구파발로 빠져 고양으로 파주로 갔을까, 북한산까지 연결된 길을 따라 중랑천을 만나 의정부로 갔을까, 그 시대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땠을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그림이나 사진을 느끼고 감상하는 법이 있을진대 다시 겁 없이 순전히 내 느낌과 상상에 바탕을 두어 그림같은 사진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러다가 그림이나 사진 감상법을 전문으로 공부하게 되면 다행이고, 또 그런 것 나는 모른다 하고 오감에 깨어 충실히 표현하는 것에 그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스스로 위안 삼는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 아닌 사람들의 몫이라고 변명하면서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속에서 한참을 노닐다가 왜 이 사진의 제목을 <봄날 인왕산>이라고 했는지 이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게 된다.

박영숙・이문선 부부작가의 두 번째 미니갤러리 사진전시회는 <봄날 인왕산>이다. 지난 번 첫 번째 전시회가 <자작나무 숲>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어, 자작나무는 어딨어?’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작품도 그렇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 어디를 인왕산이라고 하는거야?’할지도 모른다. 색깔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전문가의 작품을 놓고 비전문가들이 모여 입을 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노랑색이 많이 들어간 ‘화사한’ 작품을 좋아하지, 이렇게 ‘칙칙한’ 색깔을 누가 좋아하느냐는 이야기부터, 화사한 것은 처음보기는 좋아도 쉽게 질리기 때문에 두고두고 보려면 있는 듯 없는 듯한 작품이 제격이라는 둥 작가를 앞에 두고 할 말 못할 말 없이 쏟아 부었다. 박영숙・이문선 부부작가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가슴 넉넉한 부부작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최종 선택된 한 작품이 <봄날 인왕산>이다. 갤러리가 넓었다면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걸었을 텐데 ‘미니갤러리’인지라 한 점의 작품으로 전시를 하는 것이 컨셉이다보니 딱 한 점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 1751년, 한국화, 지본수묵(紙本水墨), 79.2x138.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국보 216호


먼저 사진 같은 그림 속을 노닐다가 온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포근하다. 저 멀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가지마다 작은 순을 달고 푸른 잎들을 보니 봄이 분명하다. 지금 내 가슴속에 불끈 열정과 희망이 샘솟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봄이라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다.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있다. 이 그림은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비온 뒤의 인왕산이라고 하는 것은 그 풍경이 주는 이미지를 말함이다. 조선시대의 여러 산수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생기발랄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은 <인왕제색도>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그대로 드러냈고, 산아래로 나무와 숲, 안개와 정자를 보여주고 있다.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인 반면에 산 아래쪽은 바로 눈앞의 시선이다. 큰 붓에 먹물가득 묻혀 그어 내린 암벽과 작은 붓으로 가늘고 섬세하게, 또 점으로 찍어서 표현한 나무와 숲은 마치 그 안에 함께 서 있는 기분이다.

<인왕제색도>를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봄날 인왕산>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인왕제색도>는 먹이 그려놓은 그림이라면 <봄날 인왕산>은 사진에 그려놓은 그림이다. 하지만 두 작품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인왕제색도>에는 능선과 숲, 나무와 정자가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면 여기 <봄날 인왕산>에는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또 없는 것이 없다.

엊그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검시와 재판을 하기 위해 형조에서 파견된 대감같은 분이 갓을 점잖게 쓰고는 형조 서리를 한 명 데리고 산을 넘어 의정부로 향하고 있다. 크고 깊은 산을 해지기 전에 넘으려거나 또 해가 일찍 지는 날에는 머물러갈 주막도 있다. 입담이 넉넉한 주모는 막걸리 한 사발 정도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줄 요량이다. 또 열심히 농사짓고 살아봐야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남는게 없고, 오히려 살림살이가 궁해져 도적이 된 사람들도 있다. 이 도적떼가 굽이마다 숨어서 지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또 몇 고개 넘으니 목탁소리 은은하고 염불소리 청아한 고즈넉한 절도 있다. 이 모든 풍경이 <봄날 인왕산>에는 표현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

<봄날 인왕산>에는 설화가 있다. 땅위의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어서 해는 밤낮으로 떠 있고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하늘에 박혀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 해의 정기를 받고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위안과 희망으로 삶을 꾸리고 있다. 이렇듯 <봄날 인왕산>에는 서민들의 삶이 있다. <인왕제색도>가 이름난 화가인 정선이 그렸다면 <봄날 인왕산>은 서민적 삶의 굴곡을 담은 민화인 것이 또 차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기법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한다. 이 작품의 기법을 표현하기는 말이기도 하고, 또 이러한 작품에서 표현하는 철학적 사조를 말하기도 한다.
<시뮬라크르>를 처음 정의한 플라톤은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우리들의 이상세계를 본떠 만든 복제물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을 다시 복제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제라고 하는 것이 완전한 복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찍을 때 모델의 겉모습은 그대로 찍을 수 있지만 모델의 마음 속에 자리한 생각과 느낌까지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제되면 복제될수록 진짜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한 순간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 즉 지금 여기에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이 정의하는 <시뮬라크르>는 거듭된 복제로 최초의 모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뀐 복사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시뮬라크르>를 철학개념으로 정리한 프랑스의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인간 삶에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는 사건은 지속성과 자기 동일성이 없이 순간적이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사건을 <시뮬라크르>로 규정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였다.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와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시뮬라크르>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들뢰즈가 정리한 <시뮬라크르>는 처음의 모델과 같아지려는 복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성을 갖는 창조성과 자기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과 들뢰즈의 시각차를 발견할 수 있다. 플라톤은 단순한 흉내나 복제물로서 ‘가짜’이기 때문에 의미 없다고 평가했고, 들뢰즈는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큰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뮬라크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어떤 때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무상(無常)>이라고 달리 말할 수 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흉내내기, 복제하기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결국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무상(無常)>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각자의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달리보이는 작품으로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봄날 인왕산>의 제작과정을 보면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조금은 이해될 듯 하다.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 다시 그 위에 색깔을 입혀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 <봄날 인왕산>은 그림일까, 사진일까?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림을 표현했기 때문에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그림이나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마저도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세계에 오직 나 자신만을 발견할 뿐이다.

색깔을 표현하는 기법에서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위계적 구조를 불식시킨 <팝아트>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어 이 사진의 장르를 <팝아트>라 하지 않고 <시뮬라크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나는 사람은 <봄날 인왕산>에서 봄날이나 인왕산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것이 진짜 연 밭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의 출발은 그림이다. 실재하는 존재를 카메라로 담은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림을 찍었고, 사진에 다른 색을 입혔으니 그 실존은 없으나 그 자체는 온갖 서민의 애환을 담은 봄날 인왕산이 되는 것이다. 색과 면이 만나는 어두운 골짜기에는 앞서 이야기한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금강경>의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불보살이 일체의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모든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렇다고 한다. 일체의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실제는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갖고 깊이 사색하며 일체의 상을 갖지 않고 바라본다면 <봄날 인왕산>에서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 안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인왕산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으로서의 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뮬라크르>, 지금까지의 이것마저도 허상일지 모를 뿐이다.

글 : 에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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