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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영월 : 역사와 자연이 숨쉬는 땅




김소영 일곱번째 편지 보낸다.

어떤 사람은 살갑게 '소영아~'라고 부르며 편지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타박하기도 한다. 무슨 어릴적 초등학교 시절에 이성의 친구들을 부를 때 성을 붙여서 '야~ 김소영!'하듯이 부른다고 말이야. 어쨌든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네가 친구라고 아직 장가가지 않는 것 걱정하며 '장가갈 걱정이나 하라'는 네 말이 더 애틋하다. 그래서 장가가기 전까지 '누나'가 되어준다면서 '왜 남자들은 하나같이 '오빠'소리 듣기를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왜 남자들은 그럴까? 나는 여동생이 없어서 '오빠'소리 듣는게 더 어색해. 그렇게 '누나'로 있어줘도 돼. 왜나면 '누나'는 동생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신경써 줘야 할 것이 많을테니까 말이다.


영월 : 역사와 자연이 숨쉬는 땅

강원도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 1박 2일동안 다녀온 강원도지만 소개(?)해 줄 곳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네. 강원도를 처음 가본 것도 아닌데 이 처럼 강원도에 대해서 생각이 많고 느낀 것이 많은 것은 아마도 그냥 휙 다녀온 것과 달리 지리적 특성을 더 생각해서 그런가하고 생각중이다.

삼척에서 다시 가던 길로 돌아오면서 영월에 들렀다. 영월은 몇 년전에 어느 환경운동단체에서 '천년의 숲'을 선정하면서 우여곡절끝에 내가 '천년의 숲 선정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어 숲을 보러 갔던 적이 있어. 제천의 의림지와 더불어 영월에 청령포에 갔었지. 그래서 영월하면 떠 오르는게 좁은 강을 배를 타고 건너 들어간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야.

그 외에도 영월하면, 책박물관, 사진박물관, 곤충박물관 등 색다른 박물관들이 많이 있어 볼거리가 있고, 특히 단종의 비애가 서려있어 왠지 슬퍼보이는 도시야. 아무리 맑아도 '초상집'에 온 분위기라고 할까? 농담을 하고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던져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그런 분위기 말이다.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진지가 60년이 넘어서도 그렇게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야.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똥고집부리며 내 목숨을 내놓고라도 인정할 수 없다고 우길때보면 그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같은 '이념'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도 해. 그렇게 종이장 보다 얇은 '사상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보면 자존심의 문제이고, 똥고집의 문제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얼마전에 익었던 최규석의 '100도씨'라는 만화를 봐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자식이 감빵에 갇히고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듯 '빨갱이 자식'이 된 것에 한 숨을 쉬다가 엄마어릴적 그 엄마가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한 것 밖에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빨갱이'라고 몰아세우고는 죽여버린 것을 떠 올리는 것을 보면 무지랭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민초들에게 그 '사상'과 '이념'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으로 60년 넘게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참 대단한 것 같애.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그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안고 있는 '단종'때문이지. 삼촌한테서 버림받고, 다시 사약을 받아야 했던 어린 단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싶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삼촌이라는 피붙이한테서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서러움이 더 컸을 것 같애. 단종이 유배를 당했던 곳, 다시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묻힌 곳, 영월에 들렀다.

영월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일부분이었고, 고이왕(234~286년)때 백제에 속하게 된 영월은 백월(百越)이라고 하였는데, 가구수가 100호가 넘는다는 뜻이있었다 한다. 그 후 고구려 미천왕(300~331년)때 고구려 남하로 고구려의 땅이 되었고,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신라의 땅이 되기도 했지. 그러고보면 삼국시대때 그 삼국의 영토가 되면서 백성들의 삶도 이리저리 방황했을까 싶다.

함께 간 동료의 고향이 이곳 영월이고, 친구들 가운데 아직 영월에 남아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 연락을 했더니 기꺼이 안내를 해 주겠노라고 오셔서 고마웠어. 영월군청에 근무하는 분인데 오랫만에 고향친구 만난 기분이 남다르더군. 나이가 50이 넘었는데도 그냥 고향친구라 반가운 모양이더라. 어릴적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어릴적 고향친구는 좋은가봐. 중간의 삶의 여정이 어떠하든 중요한게 아니고 그냥 친구라서 좋은것, 참 보기 좋더라.

 

 

▲ 사진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근현대사의 장면들

하루 해는 얼마 안있으면 저물기 시작할테고 이것 저것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많고 우리는 서둘러서 여기 저기를 다녔던 것 같다. 그 가운데 영월군청앞에 사진박물관이 있더라구. 국립박물관으로는 영월의 사진박물관이 유일하다고 하더라. 사진의 역사, 카메라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2층에는 아직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신 작가들 가운데 우리 근현대사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50년대 전후의 사진들이라 생소하기도 하면서 우리 어릴적 시절의 한 모습같기도 한 것들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더만. 다시는 찍을 수 없는 사진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 한 컷 한 컷 보는게 대충볼 수 없더만. 시간은 없는데 말이야. 밖에는 특별전시회가 대형사진으로 걸려서 전시가 되어 있는데 남한의 기자가 찍은 북한의 모습가운데 유명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더라.

 

 

▲ 임종진기자의 북한사진앞에서

영월에는 동강과 서강이 지나는 곳인데, 큰 산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의 질곡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아름답더만. 그리고 한강의 발원지가 여기 영월에서 시작한다고 하더라. 그 가운데 강이 휘돌아 나가는 땅에 한반도의 지도모양이 그대로 나오는 곳이 있어 그 지역의 지명도 '한반도 면'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더군. 긴 설명보다 그냥 자연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좋았다. 우리나라의 어느 산천이 구석구석 이런 모양이 아닌 곳이 있겠냐만은 그곳이 어느곳이든 바람불어오고 햇살이 부서지는 곳이라 그대로 멈춰서 한참을 서 있었다. 부지런히 다닌다고 하지만 벌써 해는 지는지 산그림자 검게 물들고 강속으로 해는 부서져 들어가더라.

영월에 가서 여기 저기 둘러본다고 하기는 했지만 1/10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 나중에 시간나면 한 번더 가고 싶더라. 그 많은 박물관이며 단종의 발걸음을 따라서 걸으면서 카메라들고 다니고 싶더라. 영월의 볼거리, 먹을거리들을 취재하듯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해는 점점 넘어가고, 차속에서 주전부리 하느라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기 저기 다니다보니 그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저녁먹으로 갔지. 저녁먹고 어둠이 내려 앉았을때 서울로 향했다.

간혹 글을 보내고,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게 참 반가워. 왜 그 긴시간 10년, 20년이 넘는 시간들을 이렇게 지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고 말이다. 또 보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