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하다

편지(1)

 




김소영

알고 지낸 지 3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어린 시절 이후로는 거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많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핑계에 가깝겠지? 엊그제 대학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부랴 부랴 부산을 다녀왔지. 그때 후배들도 몇 와 있었지. 그때 그 후배녀석이 하는 말이 생각나. '형은 대학다닐때 수염이 많아서 산적 같았는데, 엠티 갔을때 면도기를 두개로 밀고는 더 이상 안되어서 버린 것을 내가 면도했는데 잘만 되더만. 아직도 그래요?' 한다. 나는 기억도 없는 사실인데.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속에서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누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야.

나는 또 나의 일상의 삶의 테두리안에서 내 삶을 쪼개서 지내고 있어. 그러면서 생기는 나의 기억들과 나의 추억들도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 아닌 듯 잊혀지겠지.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 말이야. 내가 움켜쥐고 있는 그것이 마치 나의 인생 전부인것 처럼 말이야. 어떤 때는 기뻐하고, 또 어떤 때는 우울해하면서 내 삶의 두께를 켜켜히 쌓아올리고 있었던거지.

10년전 즈음에 신촌에서 동기들 모임이 잘 기억도 안나. 그때 몇몇 친구들을 또 10년만에, 더 오랫만에 그렇게 만났지만 다시 10년의 세월을 보내고는 10년이라는 세월속에서 그런 모임이 있었지 하는 아련한 기억밖에는 없었지. 그때 중학교 졸업하고는 거의 처음보는 것 같은 반가움으로 너를 만났지. 그것을 또렷히 기억해.

이제는 내가 글적이는 블로그의 팬(?)이 되어 소통하지만 그 긴 세월의 깊이만큼 나를 담고 있지는 못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조금이나 내 삶의 큰 테두리와 방향은 담겨있겠지 하는 것으로 내 이야기는 대신하려고 한다. 가족들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나이들어 가면서 '결혼안하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이제는 그것마저도 만성이 되어가는 시기다.

우리가 클때에는 결혼이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드시 해야 할 통과의례라고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나이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은 그것머저도 무뎌지고 있다. 언젠가 우리 형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있지. '너도 내 성격알지만 내가 일에 빠지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워크홀릭처렴 사는데, 괜히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한 여자 고생시켜서 되겠어? 그냥 이대로 살련다'고 했지. 그 이후로 나를 이해한 것인지, 포기한것인지 더 이상 강압적인 분위기의 '결혼'이야기는 없었지. 또 우리 막내누나가 하도 걱정이 돼서 어느 점집에 들어 물어봤더니 '동생은 40이 넘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전에는 또 말을 않더군. 아마 그 점장이 말을 그대로 믿었던가봐.

대학다니면서 불교를 알게 되고, 그동안 어렸을때 막연히 알고 왔던 우리 어머니의 불교가 아니라 진정 사회문제에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는 참여불교에 대해 눈뜨게 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어. 20대때에는 철없는 열정으로 나를 단련시켰고, 30대때에는 내 삶의 전체에서 '후회없는 열정'을 쏟아내기로 마음먹고 작정하고 달려들었지. 그렇게 10년은 훌쩍 지나가더군. 그 가운데서 만났던것이 생명과 생태를 중심철학으로 하는 환경문제였어. 불교와 생태 - 내 삶을 가로지르는 중심 철학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러면서 단순히 구호로서의 철학과 메시지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행동철학을 연구하게 되고 지금도 풀지못한 숙제로 남아 있어.

과제와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바뀌지 않으면 안되는 문명의 전환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개인의 삶의 행복과 변화인데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의 패러다임인거지. 모르는 것은 알게 해서 깨우치면 되는데 알면서 바뀌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들의 기억을 지배하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다. 
 
20대 때는 연애도 열심히 해봤고, 30대는 열정적으로 일을 해봤고, 새로운 40대는 새로운 내 개인적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야할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지. 사사롭거나 작은 것에 얽매여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속에서 스스로의 포지셔닝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지.

오랫동안 뚝 떨어져 있다가도 언제 만나도 반가운게 고향친구들이지. 1년에 전화 한 번 통화할까 말까하다가도 전화받으면 엊그제까지 만났던것처럼 이야기하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는것 말이야. 어릴적 나름대로 궁핍했던 삶이 아픔과 상처로 남기보다는 아련한 추억과 내 삶의 풍부한 바탕이 되고 자산이 된 것은 참 고마운 일인것 같아. 지금도 어릴적 산골의 삶은 내 전부는 아니었지만 아련히 떠 오르는 장면들은 가끔씩 웃게 만들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네 나이가 얼만데?'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도시사람들이 많아.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공통분모가 되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서로 동감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10년전에 신촌에서 만나고 다시 10년만인데 결혼은 했니?'라고 했을때 '나 그때 만났을때도 결혼했었어!'하던 네 말이 참 푸근하게 들리더라. 한참 초등동기카페에 들락거릴때가 있었어. 지금은 전체 동창회를 마친 이후 모두들 조금 시들해졌지. 그때 들락거리면서 어린시절을 추억하면서 이런 저런 글들도 올렸는데, 마치 지금 그런 기분이야. 공개편지(?)의 형식을 띄는 것은 우리 동기들 가운데 이 블로그를 열심히 찾아주는 건 너뿐인것 같아서 여기 글을 올린다.

내 블로그에서 글을 썼던적 있지만 내 아버지의 나이를 처음 안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지금의 나처럼 고뇌하면서 아직은 철없는 삶으로 방황했겠나 싶다. 문득 봄의 꽃들을 보면서 감탄사를 내뱉고 그동안 이 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구나 자책하면서 봄의 향연을 즐겼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문턱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어느날까지만 봄이고, 그 다음날 부터 여름이 아니잖아. 그렇게 봄과 여름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그 공존의 시간속에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 밀고 당기면서 조금은 아쉬워하면서 조금은 너그러이 봐주면서 말이야.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활의 지혜같은 것을 느끼기도 해. 너무 각박하게 원칙을 따지며 스스로를 옥죄는 것보다 그렇게 너그러이 봐주면서 조금은 아쉬워하면서 말이야. 나이들어가는 모양이다.
지난번 안철수교수가 '청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덜먹이면 육체적 나이와는 관계없이 노인이고, 미래를 내다보고 꿈을 꾸는 사람은 육체적 나이와 관계없이 청춘'이라는 말이 크게 공감되더라.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청춘'이기를 바라면서 그 잣대에 나를 놓으려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피식 나왔지. '과거의 추억을 훌륭한 자산으로 삼고 항상 미래와 비전을 준비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더 길게 썼다가는 아마도 읽지 않고 스크롤 대충 내렸다가 닫아버릴가 염려되어 이만 줄인다. 다시 기약없이 2편을 써겠노라고 큰 소리치면서 마친다. 만나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던지, 여기다가 장황한 우리 어린시절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던지 하자.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