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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누구 없는가




종정 법전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



사람들은 바쁘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걸음이 분주하기만 하다. 정작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던가? 지금 여기에 오기 전에는 집에서 왔고, 그 전에는 … 어머니 뱃속에서 왔고, … 다시 어머니 뱃속에 오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그렇게 온 곳을 모르고 갈 곳 또한 모르고 바쁘게 살고 있다.

<누구 없는가> 한국불교의 최고종단 조계종의 어른 종정스님인 도림 법전(道林法傳) 선사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이 나왔다. 처음 책을 보자 마자 가슴이 뭉클했다. 무언가에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라는 것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마치 목소리에 힘을 넣어 쩌렁쩌렁한 소리로만 읽어야 하는 제목이다. 고함이라도 지르듯 말이다. 세상사람들 다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소리지르듯 읽어야 하는 제목이다. <누구 없는가?>


이 시대를 청정하게 이끌 사람, 그 누구 없는가!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온화한 마음으로 세상을 품고, 깨달음에 한 생을 바친 조계종 종정 법전큰스님의 자서전. 오로지 수행 하나로 일관하며 일생을 하루처럼 살아온 스님의 치열한 구도적 삶!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나와야 한다는 믿음으로, 참으로 눈 밝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 마지막 염원인 법전스님.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이며, 수행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종정스님의 뜨거운 가르침!


이 책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법전스님의 치열한 구도의 삶, 수행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당신의 삶 자체가 가르침이 되고 있다. 그것도 어른스님으로서 그칠 것 없이 내두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 모셨던 성철큰스님의 말씀으로, 함께 정진했던 선승들의 말씀들을 전하는 형식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1938년 열 네 살의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수행생활을 한 지 70여 년이 넘은 삶을 회고하면서 출가수행자로 살아 가는 이유에 대해서 서산대사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출가하여 승이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안하고 한가함을 구함이 아니요, 따뜻한 옷과 잠자리와 배불리 먹기 위함이 아니요, 명예와 이익을 구함도 아니다.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요, 번뇌를 끊기 위함이요,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함이요, 삼계에서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올해 여든 다섯인 큰스님의 삶이 이와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공부했고 옆눈 돌아보지 않고 정진했다. 오로지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열정만 있었지 다른 것을 찾아 다닌 적도 없다. 그런 출가자의 삶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대로 우리들에게 가르침이 되고 있다. 또 중간 중간에 수행자로서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라고 일갈하신다.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시간 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고, 도대체 어느 겨를에 공부하겠는가. 부처조차 뛰어넘어야 하는 도의 길이 그리 쉬운 길이라면, 저 수많은 조사들이 무엇 때문에 몇 생을 두고 고행하면서 도의 길에 목숨을 바쳤겠는가.

행자생활할 때 외우고 다녔던 <자경문>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경책하게 한다.
-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금하라
- 나의 재물을 아끼지 말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 착한 벗은 가까이 하고 삿된 벗은 멀리하라.
- 삼경三更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 나를 높이고 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 재물과 여자를 대하거든 반드시 바른 생각으로 대하라.
- 세속 사람을 사귀어 미움받지 말라.
- 대중 가운데 거처해서 마음을 항상 평등하게 가지라.

이 내용들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도 생활속에 품고 살아봄직하다. 먹고 작고 입는 것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경책이 아닐 수 없다.


평생의 스승 성철선사와 함께


평생의 스승, 성철 큰스님과 함께 수행정진 하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공부에 매진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봉암사결사에서 처음 만나서는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1947년부터 시작된 봉암사결사는 해방이후 불교계도 왜색불교를 벗으려는 자정운동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봉암사 결사는 선풍을 지키고 ‘부처님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되었다. 수행을 철저히 해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수좌들이 제정하고 실천에 옮긴 공주규약 共主規約 18개 항은 봉암사 결사가 추구했던 결사의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 힘을 다해 수행하여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 어떤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개인적인 의견은 배제한다.
- 일상에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
- 신도가 불전에 공양하는 일은 재를 지낼 때의 현물과 지성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친다.
- 용변 볼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오조가사를 입는다.
- 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으며 반드시 함께 다닌다.
- 가사는 마麻나 면으로 한정하고 이것을 괴색으로 한다.
- 발우는 와발우 이외의 사용을 금한다.
- 매일 한 번 능엄주를 독송한다.
-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대계를 읽고 외운다.
-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앉는 순서는 법랍으로 한다.
- 방사 안에서는 반드시 벽을 보고 앉으며 서로 잡담은 절대 금한다.
- 정해진 시각 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 필요한 모든 물건은 스스로 해결한다.
- 그 밖의 규칙은 선원의 청규와 대소승의 계율 체제에 의거한다.
- 이상과 같은 일의 실천궁행을 거부하는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일제는 승려를 강제 결혼시키는 등 계율이 무너지고 출가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때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봉암사규약은 그 내용만으로도 얼마나 치열한 삶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후 법전스님은 수행을 할 때와 수행지도를 할때 이 봉암사결사때 정진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위 규약중에 <신도가 불전에 공양하는 일은 재를 지낼 때의 현물과 지성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친다>라는 것이 눈에 띈다. 요즘의 사찰들은 대부분 재를 지내서 그 비용으로 사찰을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다. 지금과는 다르게 신도의 불전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청정하게 살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정신이 엿보인다. 몇 년전에 서암큰스님이 입적한 후 49재를 지낼때의 일이다. 수많은 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경을 독송하고는 사회자가 ‘지금부터 서암대종사의 49재를 봉행하겠습니다. 대중여러분은 자리에 앉아주십시오.’하더니 죽비소리가 세 번 딱, 딱, 딱 나더니 이어서 사회자가 ‘이것으로 49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하던 일이다.

또 위의 규약중에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는 것을 통해 당시 사찰의 운영형태를 알 수 있고, 그것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절대고독의 자립의 삶을 지향하는 눈물겨운 정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정한 비구의 삶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


밥 값 내놓거라, 이놈들아!

성철큰스님은 대중이 앉아서 졸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고함을 지르거나 몽둥이를 내리치는 게 다반사라 온 대중이 바짝 긴장하며 정진했다고 한다.
“밥 값 내놓거라, 이놈들아!” 성철큰스님이 대중들을 향해 고함치면서 주로 했던 말씀이다. 또 있다.
“돈은 비상과 같데이, 거저 얻게 되는 돈을 뿌리치는 사람이 가장 용기있고 청정한 사람인 기라.”
“공부를 제대로 이루기 전에는 공부란 이름도 붙이지 못한데이.”
“적어도 하루 20시간 이상 화두가 한결같게 들려야 비로소 화두공부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이다.”

성철큰스님을 시봉하면서 생활하는 것 모두가 그대로 참선이었던 시절 1954년경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받고 법제자로 인가받았다.

선禪은 직관이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말이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경험해보지 못하고서는 어렵기만 하다. 봉암사아래에 위치한 정토수련원에서는 이러한 선에 대한 내용을 <깨달음의 장>이라는 수련프로그램으로 4박5일동안 진행한다. 불교신자이거나 아니거나,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7일간의 여행>에 ‘깨달음의 장’이 일부 소개되어 있고, 한 번에 20여명의 수련생만이 참가할 수 있고, 평생에 한 번만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깨달음의 장 수련문의 054-571-6031)

누구 없는가?

천제굴에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신도들이 찾아왔고 신도들에게 업장소멸을 위한 참회의 3천배를 처음 시작한 곳이 천제굴이었다고 한다. 성철스님 생전에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법칙처럼 되어 있던때도 있다.

어떤 비구니스님이 대중들을 이끌고 와서 밤새도록 3천배정진을 하고 새벽예불 후에 성철스님은 법상에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들에게 휘두르면서 “누구 없는가?”하고 일갈하셨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성철스님은 법당에서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한 마디는 실로 뜻 깊은 법문이었고 세월 흐른 지금도 가끔 그 말씀이 떠 오른다고 한다.

또 성철스님은 다섯가지 계율을 총림 대중에게 가르치셨다.
첫째, 네 시간 이상 자지 말라.
둘째, 잠담하지 말라.
셋째, 정진 중에 문자를 보지 말라.
넷재, 포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 일을 하라.

1956년 겨울, 암자의 문을 걸어 잠갔다. 부엌에 쌀이 두어 가마니쯤 있었다. ‘이것을 다 먹도록 마음의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내 발로 이곳을 걸어 나가지 않으리라.’ 공부하는 수좌에게 공부의 진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하며 ‘마음을 밝히지 못한 채 오늘 호흡이 끊긴다면 이 몸뚱이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죽으며 지옥행’이라는 간절함을 담고 정진했다. 잠을 잊은 채 좌복에 앉아있는 날이 점점 많아진 어느날 깨달음의 게송을 불렀다.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치니
비치는 것과 그림자가 둘 다 없더라
이것이 또한 무슨 물건이냐
청산이 백운 속이더라

성철 큰스님께 인가를 받은 다음 태백산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10년동안 머물렀다. 그때 석주스님, 서암스님, 일타스님, 지유스님과 함께 수행정진 했다고 한다.

서암큰스님은 성철큰스님이 입적한 후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다섯 비구 중 제일 연장자이면서 소탈하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서암큰스님의 말씀은 선사상의 진수를 담아 놓은 <자기 부처를 찾아>와 <어디에도 걸림없네>가 있다.


서암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많이 아는 것은 귀한 것이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다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이 갖는 것은 부한 것이나 그보다 더 부한 것은 하나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는 것은 용익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입니다“했던 분이다. 

법전스님은 시인이다. 도반들과 정진하던 어느 음력2월에 내린 눈을 보며 읊은 시라고 한다.

내가 묵묵하고 말 없는 너에게 묻고자 한다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지었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고개를 한 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에 희어버렸더라

또 사자암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산과 바위가 나의 벗이요
흰 구름 와서 태양을 가려주면 그보다 더 효자 어디 있으랴
새들이 벗해주어 자주 와서 노래 부르니
이만하면 만족하지 더 무엇을 구하리

그러면서 “태백산에 들어가 김치 하나, 밥 하나 놓고 10년을 살았다”고 10년 세월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속에 소박하게 살았다는 것을 넘어 치열한 구도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행

근현대사를 한 눈에 보는 듯 하다. 일제시대때 출가하여 수행정진하고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겪고, 산속에서 10년간 두문불출 정진하고, 제자들을 지도하고, 해인사로 들어가 25년째 지내고 있다. 한국불교의 격동기를 지낸 산증인이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마음공부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법전스님! 한 번 선방에 앉으면 붙박이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수좌’라 불리며, 깨치지 못하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한국불교의 살아있는 큰 기둥! 80여년을 오로지 수행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인생이야기가 바로 법문이고 가르침이다.

선사들의 선문답은 범부중생으로 알아듣지도 못했겠다. 분명 그 속에 치열함이 있고, 나아감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또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도 스스로 발심하고 정진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일갈하신다.

선사들의 선어록이 큰 가르침이 되고 수행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 생활이 도(道)’라고 했던 선사의 말씀처럼 <행복한 출근길>과 <날마다 웃는 집>은 단순히 직장인을 위한,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한 아름다운 언어라고만 봐서는 안된다.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해못할 답으로 가슴이 답답해질때도 있지만 그 궁극의 답변에는 <당신, 그래서 행복한가?>라는 화두와 같은 되물음이다. 


부모로부터 오기 전에 그 어디서 왔는가? 하는 본래의 질문에 대답이 콱 막혀버리는 것이 <화두>가 되듯, 지금의 어려움, 괴로움, 슬픔이라는 현실문제속에 <당신, 그래서 행복한가?>라는 생뚱한 질문앞에 콱 막히는 경우도 있다. 한 없이 미운 남편에게 <숙이고 참회하라>는 답변은 그야말로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화두>가 되어 살아 숨쉰다. 예나 지금이나 이 화두에 몰두하여 정진할 때 부처를 뛰어넘고, 경전을 뛰어넘는 진정한 행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도림 법전道林法傳 스님

한번 참선에 들면 미동도 하지 않아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한 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한 선승 법전 스님. 1925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출생하여, 1938년 백양사 청류암으로 입산, 1941년 영광 불갑사에서 설호 스님을 계사로, 설제 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했다. 1949년 성철·청담·향곡·자운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여 출가의 전기를 맞았고, 1951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 스님을 은법사로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956년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홀로 수행정진해 득력한 뒤, 서른셋의 나이에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이후 태백산에 들어가 10여 년간 홀로 수행정진했으며, 1969년부터 15년간 수도암에서 퇴락한 가람을 중수하고 선원을 열어 후학들을 제접했다. ‘수행자는 바보 소리, 등신 소리 들어야 비로소 공부할 수 있다’, ‘바보처럼 꾸준히 가라. 그래야 자신도 살리고 세상도 살릴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법전 스님은 1996년 가야산 해인사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됐고, 2000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 제11대, 2007년 제1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수행자’라는 마음으로 해인사 퇴설당에 머물며 지금도 후학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이 글은 2009.12.15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