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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인간붓다




교회에서 아멘하는 부처님, 법당에서 아미타불 하는 하나님

내 어릴적에는 불교는 엄마와 할머니들의 종교였다. 익숙치 않은 음력으로 날을 세어가며 쌀이나 초를 사가지고 산에 있는 절에 오르던 어머니와 할머니. 다분히 기복적이던 신앙이었던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아이들의 종교였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마을 아이들과 우루루 떼지어 다니며 캐롤을 부르고 게임과 연극을 하던 것이 떠오른다.

중학교 다닐 때인가 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 집안이 시끌벅적 하던 날 나는 동네잔치구경하듯 사람이 많이 모이니 즐거워했다. 읍내에 심부름 나갔다가 친구를 만나서 교회에서 한참을 놀다가 들어와 혼난적도 있다. 아마도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시끌벅적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게는 한동안 불교는 ‘미신’이었고, 기독교는 ‘맹신’이었다. 부처님과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다. 사춘기시절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의문에 대해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좀 특별했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누구나 그런 시절을 겪었던 것같다.)

그 후에도 붓다와 예수는 (신성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나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저 위의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두 권의 책을 통해 너무도 인간적인, 그래서 가까워지고 친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붓다>와 <예수평전>이 그 책들이다.


붓다와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핍박받고 있는 중생들의 구원을 위해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다. 그 지역이 이스라엘의 핍박받는 민중이었고, 인도의 계급차별을 받는 민중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를 강력하게 원했고 그들의 희원에 응답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대중적이고 실제적이며 온화하고 부드럽다. 힘과 권력을 기초로 한 제도적 통치력에 반하여 어머니의 마음, 부드러움의 극치로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민중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했다. 깊은 산속이나, 으리으리한 성전에 신성의 영역으로 둘러쳐진 담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평전>은 조철수교수가 정리한 예수의 삶에 대한 평전이다. 예수의 음성에 대한 기록을 가장 현실적으로 풀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듯 조철수 교수는 예수의 가르침 을 문자속에 가두지 않고 본래의 의미, 예수의 음성을 그대로 들려주려고 애를 썼다. 저 하늘에 있는 메시아의 숨은 음성을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민중속에 서 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 예수평전 | 911쪽 | 조철수지음 | 김영사 | 30,000원


<인간붓다> 또한 마찬가지다. 80년대 초반에 <붓다의 시대적 재조명>이라는 법륜스님의 강의가 있고 난 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은 붓다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금빛찬란하고 박제된 불상으로서의 부처님이 아니라 민중속에서 함께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길위의 붓다를 만나게 된 것이다. 문경정토수련원에서 <깨달음의 장>수련진행을 맡고 있는 보수법사는 “내 젊은 날의 점철된 일기장 같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 인간붓다 | 576쪽 | 법륜지음 | 정토출판 | 14,500원


<예수평전>과 <인간붓다>는 과거의 역사를 고증하는 책이 아님이 분명하다. 현재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역동적인 책이다. 지금 이 혼란의 시대, 예수와 붓다가 다시 온다면 어떤 가르침을 줄까?

각 종교의 신자수를 합하면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거의 대부분이 종교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 세상은 왜 그들의 가르침대로 바뀌지 않을까? 언젠가 <인간붓다>의 저자 법륜스님은 “우리들에게 있어 종교는 단일종교다. 모두 ‘돈’을 숭배하는 유일종교이다. 그 아래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이름만 달리 할 뿐이다”라고 비판한 적 있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부처님, 예수님을 팔아서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나만 잘 되게 해주세요!’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만을 행하고 있는 것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붓다와 예수를 자기 수준만큼의 크기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뉘우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두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붓다와 예수의 삶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무소유’이다. 우리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거꾸로 가고 있다. 마치 더 많이 갖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못갖게 되면 불안해 한다. 미래삶에 대해 불안해하며 또 다른 쪽으로는 기도의 삶을 살고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법회에서 기도에 대한 설명을 한 적 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 아이는 잘 되고 있습니다. 아무 걱정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잘되게 해달라>고 하면 못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많이 달라졌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잘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지내고 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인간예수>에 대해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다고 해서 불편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인간붓다>에 대해서 불자들도 마찬가지일까? 나는 오히려 자랑스럽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위대한 사람이 나의 스승이다’라는 자부감을 들게 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나의 문제>에 해답을 찾을 수 있어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 이철수님의 판화 '묻고 대답하고'

얼마전 돌아가신 법정스님은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에 앞장 선 분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장학금을 주던 학생이 나중에 불교로 개종을 하려고 하니 스님께서 말렸단다. 같은 길이라고! 우리들도 서로의 종교 때문에 갈등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교회에서 <아멘>하는 부처님, 법당에서 <할렐루야>하는 하나님으로 보아준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 <아니계신곳 없으시고…>하면서도 붓다와 예수를 법당과 교회에만 가두어 두려고 하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살아있는 붓다,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보세요. 


이 글은 2010.03.19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