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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천 년의 침묵


<공부하라>는 말대신 이 영화와 책들을 권해보세요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 책을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문장이다. 책이 나올때부터 세간의 화제가 된 책을 이제야 읽었다. <1Q84>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이 - 분명 나에게는 그렇다 - 처음 도입부터 흡입되기까지 시간적 공백이 생긴다. 어찌보면 한 쪽눈을 반쯤뜨고 ‘그래, 이 저자는 나를 어떤식으로 몰입시키는지 한번 보자!’하는 심리인것 같다. 나는 부끄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알았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루키’를 알고 있는 듯 하다.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 ‘첫사랑’이라는 단어속에 누구나 빨려들어갈 것 같다. 스타일리쉬한 여자 암살자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작가지망생인 학원의 수학선생님 덴고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온다. 각각의 시선으로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은 어렸을때부터 가슴속 깊이 담아온 사랑이었음을 독자들은 한 참을 지나서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안도의 한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둘의 연관관계가 도대체 뭘까?’ 연속극이 극적인 장면에서 끝나고 다음회를 기대하라고 하듯이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덴고의 이야기는 아슬아슬하게 그렇게 연결된다.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는 건너뛰고 1, 3, 5...장을 먼저 읽을까 싶기도 했으니까.

공기번데기의 이야기는 참으로 새롭다. 그 이름이 ‘공기번데기’이지만 실제의 세계도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름을 붙여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속의 공상과 허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달이 하나인 세계에 살고 있다.

<공기번데기>의 실제저자 - 저자라기 보다 경험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 준 - 17세 소녀 후카에리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이야기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이야기하는 듯 하다. 또 실제로 일본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는 실험의 연속인듯 하다. 생기고 사라지고 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실험적 세상에 대한 모습도 실용적으로 보여주는 듯 같아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아쉬운점은 사건전개의 긴박성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두 권의 책으로 묶일 것이 아니라 한 권으로 끝냈으면 전개속도가 조금 나았을려나? 이 소설과 단순비교하기는 부족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천년의 침묵>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하고 있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소설에서도 그리했듯이 프롤로그는 에필로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글을 시작하는 <천년의 침묵>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팽팽하다. 중학교때 수학시간에 배웠고 그 이후로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이야기 - 피타고라스 정리에 얽힌 두려운 진실과 잇따른 죽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1. 고대 그리스의 학풍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보고,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학에 가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 인생을 새롭게 결정짓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와 마친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도 지금의 우리 대학과 조금 제도적 차이는 있지만 현자 피타고라스의 학파와 그리스의 도시국가 크로톤의 참주가 나뉘어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 서로는 물고 물리는 관계다. 크로톤 참주의 지원없이는 학파운영이 어렵고, 학파의 성과와 출신이 곧 귀족회의 등으로 진출하는 지름길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철학자이면 철학자이지, 철학자이면서 수학자, 또는 법학자 등을 두루 갖고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여기 현자 피타고라스도 학풍을 이끌면서 존경받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인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게되면 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새로운 흥미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공식을 암기하고 풀어나가는 것보다 더욱 이해의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피타고라스의 정리

현자 피타고라스는 오래전에 ‘직각을 낀 두 변 길이의 제곱의 합이 빗변 길이의 제곱과 같으면 그것은 직각삼각형이다’라는 참인 명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현자의 학파에서 수제자인 아리스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모로 뛰어다니다가 다른 수제자인 히파소스는 이 명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역도 모두 참이어야 하는데 무수한 직각삼각형을 만들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정립하게 된다.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가 각각 1인 직각이등변삼각형 빗변의 값이 구해지지 않았고, 그 무리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성과를 스승의 몫으로 돌릴 것인지, ‘히파소스의 수’라고 명명할지 고민에 휩싸인다.


3. 대한민국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

솔직히 작가에 대해 의문이다. 이런 대작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처음 쓰는 소설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작가 이선영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천년의 침묵>을 받아든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다. <1Q84>와 당당히 비교될 만하고 ‘수학’을 배경으로 한 소설영역의 확대를 가져온 다소 충격적인 이 소설이 처녀작이란 말인가?


4. <공부하라>는 말대신 이 영화와 책들을 권해보세요

수학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뷰티플마인드’와 ‘페르마의 밀실’이 있다.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아이들이 있다면 ‘공부하라!’는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두 영화를 보게 하는 것과 더불어 <천년의 침묵>을 던져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우리들도 공부하던 시절을 지내왔지만 결국 자발성을 끌어올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이 두 영화와 <천년의 침묵>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영화> 뷰티플마인드
40년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프린스턴 대학원. 시험도 보지 않고 장학생으로 입학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한 천재가 캠퍼스를 술렁이게 만든다. 너무도 내성적이라 무뚝뚝해 보이고, 오만이라 할 정도로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수학과 새내기 존 내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두뇌와 수려한 용모를 지녔지만 괴짜 천재인 그는 기숙사 유리창을 노트 삼아 단 하나의 문제에 매달린다. 바로 자신만의 '오리지날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영화> 페르마의 밀실
페르마라는 별명의 낯선 이에게 초대된 네 명의 수학자.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건 1분 이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사방이 오그라드는 밀실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압사당하기 전에 주어진 수수께끼를 푸는 것뿐! 위대한 수학자들의 이름을 딴 캐릭터들과 복수를 꿈꾸는 지능범 사이에서 펼쳐지는 고도의 두뇌 게임 스릴러.

이 글은 2010.02.10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



이선영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착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생후 8개월에 소아마비를 앓아 지금도 목발 없이는 이동이 힘들다.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던 체육 시간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과 함께 보내며 문학의 즐거움을 깨달았고, 스물여섯에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해 작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십여 년간 중학교 학생들에게 수학을 지도했고, 수학사를 다룬 책을 밤새 탐독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당시 그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어느 날 한 줄의 글이 이선영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를 발견한 히파소스를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대학원에 진학해 창작을 공부했고 단편소설을 쓰며 필력을 키워나갔다. 고대 그리스와 피타고라스학파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눈을 감고도 소설의 주 무대인 크로톤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하늘빛과 바람의 냄새, 그리고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하루하루 살아낸 그는 마침내 마흔이 되어 첫 장편을 완성했고 이 년여에 걸친 수정 작업 끝에 작품을 응모했다. 그리고 2009 대한민국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천 년의 침묵》을 받아든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수학적 '정보'가 인문학적 '성찰'로 승화되면서 고급 지적(知的) 소설의 경지를 보여준다.”, “철학이나 과학을 넘어 이제는 '수학'까지, 한국소설의 영역이 확대된 대표적 증좌!” 감히 시도한 적 없는 스케일로 이천오백 년 전 고대 그리스의 디테일을 생생히 그려낸 《천 년의 침묵》은 작가 이선영의 세계였고,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했다. ‘첫 줄의 희열’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는 이선영. 이제 그토록 원하던 작가가 된 그는 또다시 그의 심장을 뛰게 할 새로운 첫 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