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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옛사람의 글을 읽는 이유



옛사람의 글을 읽는 이유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의 이야기
<책만보는 바보>는 스물한 살 난 조선의 선비 이덕무가 1761년에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책만 보는 바보 이야기)이라는 짧은 자서전을 작가 안소영이 다시 옮겨서 풀어 썼다. 처음에 <안소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모르니, 선입견으로 판단하기에 ‘아주 젊은 여자작가’이겠거니, 그래서 풍부하지 않은 경험속에 상상의 글을 엮었나, 옛글을 풀어 쓸 만큼의 깊이는 못될텐데 하는 걱정을 했다. 나이는 칠 팔십대의 한학자 출신이 한문으로 쓰여진 고서를 한 자 한 자 분석하며 그때의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또 그렇다고 연세드신 분들의 젊은 감각의 섬세함이 부족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는 이덕무의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작가 안소영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내가 이덕무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 작가가 쓴 서문을 읽었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다시 그 부분을 펼쳐 읽으면서 작가의 서문을 깊이 음미했다. 그리고 꼭꼭 씹어 삼켰다. 침도 삼키고 눈물섞인 외로움도 삼켰다.

옛 사람이 쓴 글을 보다가 반가운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다.

옛 사람이 쓴 글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옛사람이 노래한 선비의 여유, 풍류를 담은 시, 그들의 옹고집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쓸데없기도 한 주장을 담은 주의, 파벌 등에 대한 이야기, 또 방식은 지금과 다를 수 있겠지만 백성을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 지금은 거의 학문의 분야가 분리되고 전문화되면서 한 분야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의학, 무예, 문학, 정치 등을 한꺼번에 체득하면서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것 등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럴때면 드라마 사극의 한 장면도 연상되기도 한다.

누가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러다 문득 뜻을 깨치게 되면 혼자 바보처럼 웃기도 했답니다.

조선정조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그의 벗들에 대한 애틋함이 함께 묻어있다. 가을낙엽마냥 쓸씀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움을 함께 담고 있다. <정조>하면 생각나는 단어들이, TV드라마 <이산>, 영조와 사도세자, 당파싸움과 탕평책, 정약용과 실학 등의 단어들이다. 이 시대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연암 박지원 선생과 담헌 홍대용선생의 영향을 받으며 조선 선비로서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며 살았다.

이 책 서문에서 저자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하였지만,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결코 책 속에서만 머무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불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몰두했던 실학이란 말에서, 그저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떠올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사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젊은 그들의 새로운 학문은 비롯되었으니까요. 그들 역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 보았고 날 때부터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껴 왔기에, 그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개혁을 원했는지 모릅니다.

실학에 대해서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떠올리면 안된다는 저자의 말에 크게 공감이 되고 뉘우친다. 그동안 정약용에 대한 글을 접하면서도 실학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한다 하면서도 그저 효율성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시대 조선의 유학중심의 딱딱하고 경직된 제도 속에서 효율성을 중심으로 “정말 어떤것이 효율적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급진적인 개혁과 변화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의미를 뛰어넘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책만보는 바보 이덕무는 자신 스스로 책읽기를 좋아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읽은 책 속의 옛 어른들은 날마다 시간을 정해 두고 책읽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직 어려 시각을 익히는 일이 서툴렀기에, 나는 어떻게 시간을 정해야 할지 몰랐다. 궁리 끝에 벽에 금을 그어 해가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두기로 했다.
첫 번째 금에 햇살이 닿으면 방에 들어와, 가장 환한 곳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 햇살은 천천히 내빰을 지나고 목덜미를 지나 책장을 넘기느 손등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마음에 와 닿는 책 속의 글귀도 따스하고 얼굴에 와 닿는 햇살도 따스했다. 두번째 금까지 햇살이 옮겨 가는 데는 아마 네 시간쯤 걸렸을 것이다.
햇살은 내 눈을 환하게 해주고 몸을 덥혀 준 것만이 아니었다. 햇살을 받아 환해진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런 종이 위에 놓인 검은 바둑알 같은 글씨들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책장의 보풀조차 한 올 한 올 일어서 눈부신 햇살조각이 되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일렁이는 글씨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모습이 되고 낯선 곳의 풍경도 되었다. 때로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혹은 소리 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흐린 날에도, 등잔불이 희미한 저녁에도, 나는 그 햇살을 책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또 어떠한 햇살이 들어 있어 나에게 말을 건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다.

성격이 괄괄하고 직설적이라 여러사람들이 우려했던 박제가, 옛 도읍지를 찾고 발해의 역사를 찾아 나선 유득공, 조선최고의 무인으로 알려져 있는 백동수, 서자출신은 아니지만 벗이 되어 책을 나눴던 이서구, 그리고 이덕무가 스승으로 존경했던 담헌 홍대용선생, 박제가가 스승으로 따랐고 벗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미에는 청나라 사신일행으로 방문한 후 대궐에서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책을 모으고, 분류하고, 읽고 교류하는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옛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맛은 남다르다. 옛 선비들, 특히 양반들은 상민과 노비들이 준비해 준 의식주 위에 편한 생활을 하면서, 시와 술의 여흥위에 연민과 몽롱한 관념속에 빠져살았고, 척박한 현실은 모른 척 도피적 은자(隱者)의 삶을 산 선비들이 수구골통의 보수기득권층이라 꼴보기 싫다고 비난 하는 사람도 있겠다. 물론 거기에 동의한다. 풍류와 여유, 여흥뒤에는 노비들의 고난한 삶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가끔 생각하니까 말이다.

여기서는 그들의 행태와 형식을 논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바로 내용을 들여다보고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내면으로 받아 안을 것은 없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첫번째 이유 : 옛사람들의 정취와 풍류를 배운다

옛 사람들의 삶이고, 생각이라 오래된 진부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현대사회와 그 모양만이 달라졌을 뿐 사람들의 살이는 근심, 기쁨안고 사는 모양새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벼슬자리를 버리고 은거했던 옛 선비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자본을 좇지 않는 결단을 볼 수 있고, 절제된 언어 속에 모든 것을 표현하는 정취와 풍류를 배울 수 있다. 우리들에게 그런 여유가 있던가?

세상의 부와 명예는 자본을 기준으로 돈=행복의 등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데로 눈돌릴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무얼 위해, 그리 바쁘게 가고 있는지 한 번쯤, 옛 사람들의 글과 말을 통해 돌아보는 것도 자신의 인생을 풍성하게 할 수 있을거 같다.


두번째 이유 : 옛사람들의 솔직한 내면세계를 본다

‘속에 담은 말을 다 하려고 하지 마라’, ‘붉다는 그 한마디 글자로 모든 꽃을 얼버무려 말하지 말라’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어찌보면 동시의 천진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현대 시인들의 노래소리에도 발견할 수 있겠다 하겠지만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데서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을 느껴본다.

세상엔 약도 많고, 드는 칼이 있다 하되
정(情) 끊을 칼이 없고, 임 잊을 약이 없네.
두어라! 잊고 끊기는 후천(後天)에 가 하리라.
<다정도 병인양하여> 중에서

사랑과 이별, 그리움, 기다림과 연민, 절개와 우국, 인륜도덕, 해학과 풍자 등의 글은 단순히 시(詩)를 넘어 시대적인 아픔과 개인의 솔직한 내면세계를 표현해 내고 있다. 유즘 유행가 가사가 젊은이들의 마음과 사랑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때 이 옛사람들이 마음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들의 글과 노래를 통해 그들의 마음세계의 솔직함을 함께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번째 이유 : 느림의 미학과 곡선의 철학

옛 사람의 글에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있다. 뒷짐지고 팔자걸음 걷는 양반네의 걸음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느릿느릿한 걸음속에는 바쁠 일이 없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라 하지만 지금과는 사뭇다르다.

현대사회의 직선적 세계관과 속도전쟁은 우리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편리함 이면에 도사리고 있고,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인간성의 상실, 공동체의 붕괴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환경문제 등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새로운 불안세계에 놓여있다. 그러면서도 속도를 줄일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가속도 때문일거다. 예 사람들의 그 느릿느릿한 발걸음이 담고 있는 미학과 철학을 닮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네번째 이유 : 자연과 합일적인 삶

자연속에서 자연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귀기울이며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게 식물이든, 새를 비롯한 동물이든간에 그들의 움직임에 나의 마음을 더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려고 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기다림과 연민을, 자연과 풍류를, 풍자와 해학을 담지 않았나 싶다.

※ 이 글은 2009.09.22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

책읽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옛 사람의 글들
▶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지음 / 보림
▶ 다정도 병인양하여 / 손종섭 지음 / 김영사
▶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 정민 지음 / 이끌리오
▶ 부족해도 넉넉하다 / 안대회 지음 / 김영사
▶ 소동파, 선을 말하다 / 스야후이 지음 /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