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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글맛이 입안이 아린다 : 남한산성




김훈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이 한가하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부정적인 생각속에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읽은 이병주님의 <지리산>과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이후 소설을 책을 들었던 분명한 기억은 없는것 같다. 아마 들었어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다. 바쁘다는 핑계와 끝까지 읽지 않아도 나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을거다.

내가 살아온 과거, 즉 역사가 궁금했다.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시절 어려운 왕조의 이름을 외우기 힘들어 포기하다시피해서 기억하는 상식도 없는 세계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실에서 배우는 역사말고 진짜 역사를 이해하고 싶었다. 흐름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역사에 관련된 책이라면 흥미를 조금 가지는 편이다.

아마도 <남한산성>을 잡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물론 소설이지만, 내가 조선시대 인조에 대해 기억하는 것도 없거니와 남한산성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부끄러움이 자리했기 때문일거다.

글이 아름답다
오늘 글을 시작하는 것도 소설 <남한산성>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한산성으로 천도하고 인조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의 삶을 아파하고 애통해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불손함과 야만함을 지적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은 작가 김훈의 손냄새라고 할까, 지금은 언어와 사뭇 다른 사극을 다룬 드라마의 대사같은 알듯 모를듯 한 말들 때문이다. 짧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부드럽지만 강한 뜻을 전달하는 그 뭔가의 힘이 있다.
요새 우리들은 토론문화가 발달해 있다고 하지만 말이 직설적이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상처를 주기 십상이다. 부부간의 대화도 그렇고, 친구간의 대화는 더욱 그러하다. 그냥 의미를 전달할 뿐이지 속내를 드러내어 주고받기에는 부족하다 싶다.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표현하고 그 속뜻을 분명히 전달할 때 말하는 이의 사람됨-예의범절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이 살아있을것이다.

마음을 담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들
- 경들은 저 너머 겨울 들판이 보이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구나.
- 너의 소疏를 읽었다. 뜻이 가파르되 문장이 순하니 아름답다.
- 적병이 이미 도성을 에워싸서 왕명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서북 산성에 군율이 닿겠느냐.
- 임금의 말투는 장님이 벽을 더듬는 듯했다.
- 산줄기들은 가까이 다가와 성을 겹으로 외호했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성 밖 들에 닿았다.
- 산이 물러서며 성 안팎으로 길이 열리는 자리가 조붓했다.
- 깎고 쪼고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베고 거두고 찧고 빻고 밀고 당기는 모든 연장들이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나왔다.
- 그렇겠구나.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하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 밤에, 임금은 군병들의 창자 속으로 스미는 기름기를 생각하며 자리에서 돌아누웠다.
- 국은 간이 엷어서 뒷맛이 멀었다.
- 임금은 국물에 밥을 말았다. 실진 밥알들이 입속에서 낱낱이 씹혔다. 임금은 혀로 밥알을 한 톨씩 더듬었다.
-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 명길은 울면서 노래히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옵니다.
- 전하, 빙고를 정리하다가 밴댕이젓 한 독을 찾아냈사온데, 씨알이 굵고 삼삼하게 삭아 있사옵니다. 마리 수가 넉넉지 못하오니 어명으로 분부하여 주소서.


- 수라상에 졸인 닭다리 두 개가 오르던 다음 날부터 성 안에서 닭은 울지 않았다.
- 명길이 사직을 헐어서 적의 마구간을 짓고, 백성의 나락을 거두거 적의 말먹이 풀로 내주려 하니 명길이 과연 누구의 신하이옵니까.
- 명길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적진에 보내시고 그 간을 으깨고 염통을 부수어 성첩에 바르소서.
- 언관들의 말이 심히 가프르나 대의를 밝혀 아름답다.
- 차가운 날씨에 어찌 먹이고 있는가?
- 쌀죽에 간장을 풀어서 한 그릇씩 먹였사옵니다.
- 물을 많이 붓더라도 고루 먹이고 뜨겁게 먹여라. 뜨거워야 몸이 풀린다.
- 문서에 청병을 가리켜 오랑캐 적狄 자를 쓰면 실없이 적을 노하게 할 것이므로 맞생대 적敵 자가 마땅하고 또 화친을 염두에 둔다면 북래군北來軍이나 외병外兵이 합다할 것이라고 호조는 말했다.
- 상궁은 말린 산나물과 밴댕이젓으로 저녁 수라상을 차렸다. 산나물을 데쳐서 통깨를 뿌리고, 실고추와 미나리로 밴댕이젓 위에 고명을 올렸다. 빨간 실고추와 파란 미나리가 밴댕이젓 위에서 색동으로 피어났다.
- 조정이 가난하여 너희들의 추위를 덮어주지 못하니 나의 무덕이다. 너희들이 이 외로운 산속에서 얇은 옷에 떨고 거친 밥에 주리며, 살이 얼어 터지고 발가락이 빠지는 추위에 알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 아프다.
- 고립된 성은 위태롭기가 머리카락과 같고 … 개미 새끼 한 마리 구원하는 자가 없으니 … 군부의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러 신민의 충정에 기대려 함은 … 삼남의 군사들은 밤을 새워 달려오라. 너희 의로운 신민들은 달려오고 달려오라.
- 도성을 더나 야지에 나와 있어 기름지게 먹이지 못하나, 너희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니 내 몸이 훈훈하다. 너희 몸이 내 몸임을 알겠으니, 너희도 그리 알라.
- 지금 사대부들이 성첩에 올라와서 한 가지를 보며 열 가지를 말하고, 문자를 써서 무식한 군병들을 꾸짖고 조롱하며, 주역을 끌어대며 군의 길흉을 입에 올려 군심을 불안케 하니, 사대부들의 성첩 출입을 금하여 주소서.
- 이시백은 돼지를 삶은 가마솥에 엉긴 기름을 걷어 내고 무명천을 그 기름에 쟁여 놓았다. 동상에 걸린 군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비장들이 기름먹은 무명천을 잘라서 환부를 사매주었다. 손발을 들이미는 자도 있었고, 고개를 돌려 귀를 들이대는 자도 있었다.
- 품계 높은 사대부는 길을 몰라 갈 수 없고, 품계 없는 군병은 못 믿어서 못 보내면 까마귀 편에 보내려느냐.
- 서날쇠의 행장은 가벼웠다. 초로 봉한 격서를 기름종이에 싸서 저고리 속에 동였다. 등에 진 바랑 하나가 전부였다.
- 세모에 영신迎新의 예를 갖춤은 적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옵니다.
- 보내라. 동방의 예법을 보여서 저들이 이웃임을 스스로 알게 하라.
- 다만 적장을 만나서 싸움이다 화친이다 말하지 말고 이웃간에 송구送舊의 예법이라고만 말해라.
- 언 땅에서 뽑아낸 냉이 뿌리는 통째로 씹으면 쌉쌀했고 국물에서는 해토머리의 흙냄새와 햇볕 냄새가 났다. 겨우내 묵은 몸속으로 냉이 국물은 체액처럼 퍼져서 창자의 먼 끝을 적셨다. 쌀뜨물에 토장을 풀어 냉이 뿌리를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한 숟갈 뿌렸는데, 도살장 계집종의 솜씨와 수라간 상궁의 솜씨가 다르지 않았다.
- 백성들의 국물에서는 흙냄새가 나는구나.
-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 전하, 오직 죽을 사死속에 수, 전, 화의 길이 모두 있을 것이옵니다. 화를 논할진대 어찌 사를 논하지 않으시옵니까.
- 두려움이 말을 가파르게 몰아가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소서.
-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 새카만 묵즙이 눈에서 나오는가 싶었다. 묵즙이 흘러서 연지에 고였다.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최명길이 붓을 적셨다. 최명길이 젖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
- 이제 스스로 새로워지고 기뻐서 따르려는 소방의 뜻이 돌담 안에서 시들이 않도록 살펴주시옵고, 모든 생령들의 살고자 하는 기운을 거두어서 기르시는 황제의 천하에 소방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 붓끝이 얼어서 종이가 서걱거렸다. 연지에 고인 묵즙에도 살얼음이 잡혔다.
- 황제의 깃발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스스로 자라서 아름다워지는 것일진대, 황제의 품에 들고자 하는 소 방이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 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나이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도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 마지막 몇 글자가 마르기 전에 얼어서 종이가 오그라져 있었다. 최명길은 아침 햇살에 글자들을 녹여서 말렸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거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 아들아, 너는 목숨을 귀하게 여겨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아아, 너희들은 생명에 칼질을 하지 마라. 고향에 조용히 엎드려서 세상에 나오지 마라.
- 풀 먹인 무명 옷자락이 서걱거렸고 갈아 신은 버선코가 반듯했다.
- 때가 되었다. 나는 죽으니, 너희는 그리 알라. 너희는 방 밖에 정히 앉아서 나를 보내라.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미음을 가져와라.
- 민촌은 술렁거렸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요했다.
-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 이새백은 쌀밥을 따로 짓고, 밴댕이 젓을 얹어서 질청에 누워있는 김상헌에게 보냈다.

위의 글들은 문장이 수려하여 마음을 붙잡아 두는 곳을 새로 기록해보았다. 그 중에는 특히 말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넘어 임금의 백성을 향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인도의 빔비시라 왕이 붓다를 찾아와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법에 대해 물었을때 붓다의 대답중 ‘백성을 내 친아들 대하듯 하라’는 부분이 있다. 백성이 임금을 믿고 따르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고대왕조들의 임금과 백성의 관계뿐만 아닐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씀을 돌아볼 일이다.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말을 다듬을 일이다. 그러한 붓다의 중생을 위한 교화사례를 담은 책도 있다. 샨티출판에서 발행한 법륜스님의 <붓다, 나를 흔들다>에 보면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대하는 붓다의 설법을 통해 그 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차례를 통해서도 얼핏 엿볼 수도 있겠지만 붓다는 누가 욕을 할 때나 해치려 할 때조차도 한결같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자비롭고 진실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 살려주고, 가난한 이를 보면 돌보는 그런 마음씨, 그런 말씀, 그런 행동을 보면 붓다의 인격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에 감화되어 존경을 하게 된느 것이다. 나아가 ‘나도 저분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조선의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그 자애로운 심성속에 백성들은 아마도 임금을 존경하고 따랐을 것이라고 본다. 아래 글은 자연을 표현한 부분들이다. 날씨와 계절, 생태환경의 변화, 그리고 지금의 기계문명과 달리 과거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던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으로 써내려갈 수 없는 대목이라 하겠다.

▲ 김훈 작가 / 많은 사진들 가운데 정돈된 느낌으로 가장 잘 어울렸다.

내가 작가 김훈을 잘 모르긴 하지만 글을 통해 이 분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세심하게 관찰했을 법한 살아있는 생태운동가라고 말하고 싶다. 계절의 변화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고, 날씨의 표현이 마치 내가 지금 그 안에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듯하고, 그 영상을 직접 보고 있는 듯 하다.

날씨, 계절, 자연생태를 담은 멋진 글들
- 청천강은 얼었는가?
- 헐떡이는 말들의 허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눈보라도 보였다.
- 흐린 날은 일찍 저물었다.
-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 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이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 새들은 돌멩이 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 순한 물은 여름에도 땅을 범하지 않았다.
- 겨울 해가 짧아서 산에 기댄 성 안은 일찍 어두워졌다.
- 눈 덮인 행궁 골기와 위에서 초저녁 어둠이 새파랬다.
-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푸레 열렸다.
-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 붙어 있었다.
-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있었다.
- 다시 바람이 불어서 눈이 길게 불려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드러났다.
- 깨어나는 봉우리들 너머로 어둠이 걷히는 하늘은 새파랬고, 눈 덮인 들판이 아침 햇살을 품어 냈다.
- 숲에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깬 새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앉을 때마다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갈한 추위였고, 빛나는 추위였다. 말발굽 밑에서 새로 내린 눈이 뽀드득거렸다.
- 새벽에 눈이 내렸다. 눈이 쌓여서 사공의 시체가 언 강 위에서 하얀 봉분을 이루었다.
- 그날 새벽에 강은 상류부터 먼 하류까지 꽝꽝 얼어붙었다.
- 성첩에 뚫린 총안마다 새파란 하늘이 한 개씩 박혀 있었다.
- 소화가 잘된 곱고 굵은 똥을 물에 풀어서 일 년쯤 그늘에서 고요히 삭히면 그 위에 거품이 잡히고, 거품을 걷어 내면 맑은 똥물이 익어 있었다. 서날쇠는 익은 똥물을 밭에 뿌려서 배추 잎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았고 땅 힘을 돋우었다.
- 밤에 비가 내렸다. 질기게 내려서 깊이 적셨다.
- 말들은 흙냄새 속에서 아직 돋아나지 않는 풀냄새를 더듬었다.
- 언 땅 밑에서 풀냄새는 멀었다.
- 날이 저물어서 먼 숲에 어둠이 스몄고 순찰로 앞쪽이 흐려졌다. 멀리 나갔던 새들이 성 안 오리나무 숲으로 돌아왔다.
- 달이 능선 위로 올랐다.
- 묵은 눈 위에 밤새 또 눈이 내렸다.
- 봄이 오지 않겠느냐. 봄은 저절로 온다.
- 눈 쌓인 우둠지가 햇빛을 튕겨 냈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면 빛의 줄기들이 부딪쳤다. 잎 진 나무들은 줄기만으로도 길차고 싱싱했다.
- 겨울 해는 일찍 저물었다. 눈 덮인 산속의 어스름은 차고 새파랬다. 하얀 성벽이 노을 속으로 뻗었고 먼 노을에 닿은 북장대 족 성벽은 붉고 선명했다.


- 아비가 사공이니 물가에서 자랐겠구나. 송파강에는 물고기가 많으냐? 무슨 고기가 잡히는고?
- 쏘가리, 배사가리, 어름치, 꺽지…
- 아하, 그러냐. 그게 다 생선 이름이구나. 이름이 어여쁘다. 꺽지란 무슨 생선이냐?
- 강 가장자리 쪽에서 사는 생선인데, 꼬리가 둥글고 아가미가 무지개 빛이라 하옵니다.
- 송파강은 언제 녹느냐?
- 봄에…, 민들레꽃 필 때…
-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어 나무와 눈이 뒤엉겼다. 눈에 눌린 나뭇가지 찢거지는 소리가 장지문 창호지를 흔들었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휩쓸고 내려가면 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무들이 찢어졌다.
-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 아침에는 소나무 껍질의 고랑 속이 맑아 보였고, 저녁에는 성벽에 낀 얼음이 노을에 번쩍였다.
- 행궁 마당에는 생선가시 같은 비질 자국이 선명했고, 저녁의 빛들이 가시 무늬 속에서 사위었다.
- 바람이 잠든 날 눈이 내래면 숲에서는 길이 먼저 하얘지고, 들에서는 언덕이 먼저 하예졌다. 바람 부는 날 눈이 내리면 산에서는 골짜기와 먼 바위가 먼저 하얘졌고, 마을에서는 초가지붕과 나무 꼭대기가 먼저 하얘졌다.
- 추위가 팽팽해서 별들이 닿을 듯했다. 가까운 별들이 성 안에 가득 차서 아른거렸다.
- 묵은 눈이 갈라진 자리에 햇볕이 스몄다. 헐거워진 흙 알갱이 사이로 냉이가 올라왔다. 흙이 풀려서 빛이 드나드는 틈새를 싹이 비집고 나왔다. 바늘끝 같은 싹 밑으로 실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었다.
- 뿌리가 깊어야 싹을 밀어 올린다. 봄은 지심地心에서 온다고, 냉이를 캐던 새남터 무당이 말했다.
- 눈 녹은 물이 인마의 시체로 썩어 가던 불을 물을 밀어내고 강을 가득 채웠다. 새 물로 흘러가는 강은 향기로웠다. 강물은 먼 산악 속의 비린 봄냄새를 실어왔다. 어린 물고기들은 햇볕이 쪼이는 따스한 물가 가장자리로 몰려들었다.
- 조선의 봄은 어린 계집과도 같구나.
- 송파강의 여울은 빨랐다. 지저귀는 물 위로 물비늘이 튀었다.
- 해가 하류쪽으로 내려앉으면 강물은 붉은 노을 속으로 흘렀다.
- 눈녹은 논바닥에 물기가 잡혔고 진한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 올봄은 해가 곱구나. 꼭 저승에 내리는 햇볕 같구만… 기침을 쿨럭이는 늙은 옹기장이가 말했다.
- 먼 봉우리들이 깨어나고 안개가 골짜기 아래로 깔렸다. 새벽빛이 닿은 숲이 열려서 젖은 향기를 풀어냈다.
- 남쪽에는 눈이 녹아서 개울물이 불었고 산수유 꽃망울이 맺혀서 산들이 구름처럼 부풀었으며, 청병이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들은 비탈 논에 쥐불을 놓고 두엄을 실어 냈고 두 살배기 어린 소를 빈 논으로 끌고 나와 매질을 해서 농사일을 가르쳤다.
- 며칠 전 성첩에 올라가서 삼전나루 쪽을 살폈사온데, 물빛이 푸르게 살아났고 먼 상류부터 물 위에서 햇빛이 튕기면서 흘러 내려왔으니, 송파강은 이미 녹은 것으로 아옵니다.
- 우물이 시체로 메워졌고, 무너진 우물 옆에서 매화가 꽃망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 봄 물이 부풀어서 강은 가득 차 흘렀다. 물 위로 먼 산악의 봄냄새가 실려 왔다.
- 물이 불어 송파강은 숨이 찼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이식시킨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들을 새롭게 살린다. 자연을 체험하지 않고 자랐을 요즘 세대들에게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을 간접적으로 이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내안의 생태적 감수성을 길러내고 그 연관과 조화를 깨달을 수 있다면 심성이 고와질 것이다. 고요해진 심성과 부드러워진 우리들의 삶이 어찌 이 소설이 기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뒤에는 남한산성 고지도가 실려있는데 글을 다 읽고 보면 좋을 듯 하다. 산성을 미리 가보고 훤히 알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리 본다고 한들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잃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적을 생각하며 지도를 보면 그 맛이 새롭다.
또 <조선왕조실록>중에서 <인조실록>부분을 날짜별로 짧게 정리한 부분도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니다. 기막히다. 사실과 사실을 이어주는 작가의 상상력이 현재의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꼭 읽어볼 만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간결하고 단아해서 그 맛이 입안에서 남는다. 직설적이고 건조한 요즘의 언어를 걷어내고 나도 흉내내면서 살아볼까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출근전에 문자를 넣었다.
귤이 먹고 싶소. 백성들은 차디찬 사무실에서 언 발과 시린 무릎을 두 손으로 부비며 지내고 있을터인데 배부른 욕구가 아닐까 두렵기만 하오.  귤이 왔다.

이 글은 2009.03.01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