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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버티다

[환경칼럼] 천년의 숲, 천년의 마음



ⓒ 황만복

지금 우리에게 숲은 어떤 의미일까? 도심의 무분별한 개발열풍은 쉽게 식을 줄 모른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 서로가 답답해하며 이해를 못해준다고 가슴을 치고 있는 경우가 종종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전제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도시내의 녹지공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나마 있던 녹지공간을 저렇게 건물짓는다고 없애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냥 있을까?”
“많고 많은 녹지공간가운데 저런 것 하나 정도는 없애도 괜찮아!”
“녹지공간의 푸르름이 우리들에게 주는 잇점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이 살 집이 부족해서 짓는다는데…”

지금 우리들에게 숲은 어떤 의미일까? 숲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내가 어렸을때만 해도 숲이란 거저 겨울철 땔감을 만들어주는 좋은 터전이었다. 겨울방학이 되면 오전에는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얼음을 지치고, 오후에는 겨울햇살에 서서히 녹아가는 얼음위로 조심스럽게 강을 건너 겨울땔감을 해 오는 게 하루일과중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적당하게 자란 오리목을 잘라 도끼로 장작을 패던지 마른 솔잎으로 갈퀴로 긁어모아 오는 것이 그때의 어린 동무들이 늘 하던 일이었다. 이렇게 과거에는 땔감용으로 쓰이는 직접적인 효용가치만 더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더 먼 옛날에는 숲이 가진 정신적․영적 가치를 중요시 여겨 숭배했을 것이다.

요즘은 숲의 환경적 기능에 더 주목하고 있다. 물을 품거나 내뱉으며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산업사회로 성장하면서 환경문제가 파생되었고 산림이 갖는 기상완화 기능은 물론이고 대기 정화 기능과 쾌적한 환경을 형성할 수 있는 기능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숲은 환경재 또는 환경자원으로서 그 효용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되었다.

또 성장과 발전지향의 산업사회는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에 비해 숲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문화적 가치는 경제적 기능과 환경적 기능과 더불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생태환경 교육을 위한 공간, 예술활동을 위한 소재와 공간, 건강유지를 위한 휴양활동과 레포츠를 위한 공간마련 등 문화자원으로 새롭게 인식되는 이유는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정신적 자양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작은 뜨락에 숲이 만들어졌다. 건물 뒤의 조그만 공간에 숲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부끄럽지만 숲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적 휴식의 공간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를 다듬지 않아 제멋대로 가지를 뻗고 있는 사철나무와 쌀쌀한 가을바람에 붉게 물들어 있는 단풍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고 담장이 넝쿨은 몇 년을 견뎌낸 그 힘으로 벽을 꽉 잡고 있다. 벽과 건물사이의 좁은 공간에는 타일을 세워 곡선의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버려지는 화분과 화초에 정성을 기울여 그 안에서 모여살게 하고 있다. 장독 두껑에는 물을 담아 물옥잠을 심어두기도 했다. 두어 평 공간의 숲이 주는 여운은 나와 이웃을 기분좋게 하고, 내가 그리는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당신은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구름이 흐르고 있음을 분명히 보게될 것입니다. 구름이 없이는 비가 없으며, 비 없이는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없이 우리는 종이를 만들수가 없습니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필수적입니다. 만일 구름이 이곳에 없으면 이 종이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름과 종이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종이 안을 더욱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햇빛을 보게 됩니다. 햇빛이 그 안에 없다면 숲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햇빛이 이 종이 안에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종이와 햇빛은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평화로움’중에서)

최근 어느 단체에서 주관하는 천년의 숲 선정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숲은 숲으로만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천년의 숲은 천년동안 보존되어 온 숲의 역사성만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검토도 물론 중요하다. 이것 외에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된 숲인지, 또 지역의 생태계 보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지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곳 지역의 풍토에 잘 어울리고 적응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곳을 찾는 사람들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숲과 함께 어우러져 훼손하지 않고 잘 보전하려 할 것이다.

마을 숲이 전통적으로 잘 보전되어 온 곳도 많다. 숲을 통해서 마을공동체를 지켜내고 그를 통해 다시 숲을 보전하는 숲과 공동체의 관계는 이처럼 중요하다. 숲의 보전은 강렬한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숲은 푸른 지구별의 생물다양성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로,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때 지켜질 수 있다. 자연을 물질로만 보지 않고 정신적 가치로도 인식했던 조상들의 문화적 소양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풍류와 멋을 알고 즐겼던 옛 선조들의 문화유산에서 자연을 배려한 흔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오히려 수백 년의 전통속에서 여유와 자연을 담은 사찰의 가람배치도 새로운 ‘불사’로 여유를 잃어가고 편리를 좇아가는 것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문화,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합일이 중요하게 제안되고 있는 이 때, 자연을 정서적이며 정신적 중요도를 생각한 선조들의 자연친화적 자연관을 숲을 통해서 복원시키는 방법을 찾는 일이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 글은 월간설법 2006년11월호에 실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