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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

[책리뷰] 덕혜옹주





오랜만에 종로에 나갔을 때 버스정류장에 온통 도배하다시피 한 ‘조선 최후의 황녀’라는 포스터를 봤다. 무슨 공연안내 포스터인가 하다가 책이 곧 나온다는 소식을 알리는 광고포스터였다. 며칠 후 신문광고에 실리자마자 책을 구입했다. 왜 우리들은 조선의 마지막 황족들을 지켜내지 못했을까?

고종의 딸로 태어나 귀품 있고 당당하게 자란 조선 최후의 황녀.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고종의 죽음에 원한과 슬픔을 품었다.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일본순사에게 끌려가며 매질당하는 <복순>을 처음 만났을때 그 당당함은 조선황실의 자존심이었다.

“그 아이에게서 칼을 거두라. 백주대낮에 칼을 빼들다니 무엄한지고!”
당당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치켜들었던 팔을 칼처럼 겨누었다. 순사의 얼굴이 벌레 씹은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도 칼끝으로 옹주를 겨누었다. 황급히 뒤따라 온 유모가 그 모습을 보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이놈! 어느 안전에 칼을 들이대느냐! 당장 치우지 못할까!”
(중략)
“어느 안전에 칼을 겨누느냐,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이 분은 대한제국 황제의 여동생, 고종황제의 금지옥엽이신 옹주마마시니라.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중략)
“이 아이는 내가 거두겠다”

▲ 황족의 가족사진

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얻고 황적에 올릴때 일본유학이 결정되어 떠나게 된다. 덕혜는 한 개인의 자격으로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 아님을 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평소에 그랬듯이 그 기품은 황실의 그것 자체였다.
양 귀인 서럽게 흐느겼다. 덕혜가 두 손을 겹쳐 이마로 들어 올렸다.
“어머니, 소녀의 절을 받으소서.”
덕혜가 마지막인 듯 예를 올렸다.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옥체 보전하소서.”
덕혜는 양 귀인과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머니에게 절을 올린 후 다시 궁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 소설 <덕혜옹주>
학교생활 내내 고통스런 나날들은 조국 조선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견뎌냈다. 순종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그때 조선에 잠깐 발길을 머물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볼모로서의 삶이었다.
강제로 결혼하게되었다.
“그 또한 옹주마마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 양친을 잃고 소 가에 들어가 양자가 된 청년입니다. 서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양친까지 잃은 대마도주의 양자라고 하였소?”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경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주 훌륭한 청년 백작입니다.”
“그만하오”
영친와의 양미간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덕혜와 다케유키는 부부가 되었고, 덕혜의 마음을 진실로 열어보려고 애쓰는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 러는 사이 딸 ‘정혜’가 태어났다. 어려서는 조선왕실의 법도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는 ‘조선의 피’가 섞인 조센징이라는 놀림속에 어머니인 덕혜마저도 싫어하게 된다.

결혼후에는 조선황녀로서의 기품은 잃지 않고 언젠가는 딸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 선명한 덕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이 책은 7년의 세월동안 정신병원에서 우두커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지낸 아픔의 시간들을 불과 몇장에 서술하고 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7년동안 정신병원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마저도 지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것이다.
“김장한, 꽃 같은 소년이었던 그대여. 어쩌다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된 것인가.”
(중략)
‘고맙습니다, 고맘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혜의 눈빛이 그렇게 얘기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마!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 변치 않고 여태 지켜왔습니다. 이 김장한을 잊지 말아주소서. 마마!’
결코 입 박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가슴속에서만 비밀로 간직한 말이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잊지 않았어요. 내 나라 조선을. 그리고 그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날, 아바마마의 시종무관을 따라 가던 소년, 어쩌면 내 지아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도 그대를 사랑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꿈에도 그리던 조선 땅을 알아보았다.
'여기는 조선 땅이다. 나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다. 나는 드디어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꿈은 아닌가.’
그녀는 기적처럼 조선을 알아봤다.

실제의 기록속에 나타난 덕혜옹주와 관련된 자료들 가운데 덕혜옹주를 다시 대한민국으로 모셔올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한 김을한기자는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귀환을 요청했을때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왕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왕족들을 천대했다고 한다. 이씨 왕가의 자손들은 해방이 되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시대적 아픔이지 않을 수 없다. ‘왕정복고’...이승만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세월이 지나 조선의 민족으로서 손가락질 받을 부끄러움이 더 두렵지는 않았을까.

▲ 덕혜옹주의 묘
오늘 아침 뉴스에는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유족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1인당 99엔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지자 시민들 사이에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본에 강제 동원된 근로정신대 할머니, 강제노역에 참여한 할아버지, 또 군인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와 시대적 아픔만큼이나 동시대를 살았던 덕혜옹주에게도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작가는 덕혜옹주에 대한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보게 되어 슬픔의 역사를 지닌 그녀를 재현해 내고자 했다고 한다. 인터넷 곳곳에는 덕혜옹주에 대한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사진과 함께 많이 떠다닌다. 그리고 이 책을 발행한 다산책방의 카페에 들어가면 저자인터뷰 동영상도 볼 수 있다.
 
내가 대한제국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옹주의 위엄을 잃은 적이 었었더냐.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말처럼 그녀는 그 시대적 아픔속에서도 황녀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은 단지 황녀 개인이 아니라 조선과 조선민족을 대신한 자존심이었다. 소설을 통해 복원된 덕혜옹주의 이야기는 과거사의 한 부분이 아니다. 덕혜옹주가 개인이 아니듯, 그녀의 이야기는 살아 숨쉬는 지금의 역사이고, 이어진 분단의 과제를 해결해야 할 미래의 역사이다.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프다.

이 글은 2009.12.24에 포스팅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