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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미니갤러리 12번째 : 공산무인(空山無人)

 

 

침묵과 고요 VS 변화와 소통

 

 

침묵과 고요의 세계, 변화와 소통을 꿈꾸는 역동성, 이 두가지 영역의 조화는 '생명'이라는 것으로 귀결한다. 생명의 양면성을 모두 표현하고 있는 <공산무인空山無人>에서 중도를 발견해보세요.

 

미니갤러리 12번째

2012. 9. 25(화) > 10. 31(수)

※ 2012.9.25 오후3:00 오프닝이 있습니다.  

 

 

공산무인 空山無人, 박영숙․이문선, 118cmX70cm, C-print, 2012 행복한책방

 

>> 작품소개

 

미니갤러리의 열두 번째 작품이다. 미니갤러리가 열리게 된 배경은 이렇다. 평생을 사진만 찍었다는 작가님의 사진을 여기, ‘행복한책방’에 걸고 싶었다. 평생을 찍은 사진 가운데 한 점도 좋고, 새롭게 만든 작품도 좋고, 그저 한 작품 걸어두고 싶었다. 작가님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갖 상상을 시작했다.

 

언젠가 팔판동의 어느 디자인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입구의 작은 공간에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두 점의 작품, 한 점은 도자기이고 다른 한 점은 불경佛經 의 한 부분이었다. 두 작품을 소개하는 도록은 그야말로 연구논문 몇 편을 실은 것 같은 무게였다. 한 작품을 이렇게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감상과 실제를 표현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미니갤러리를 구상하고 있었을 때 그 팔판동 디자인 사무실의 작은 전시회를 떠올렸다. 여느 갤러리와 달리 오직 한 작품을 걸어 두고 천천히 바라보는 시선이 재미있고,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새라 손을 잡아주는 친절함이 있다.

 

 

공산무인 空山無人

 

이번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탄성처럼 입에서 새어나오는 한 마디가 <공산무인空山無人>이었다. ‘공산무인’은 그림보다 글을 먼저 만났다. 송나라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소동파蘇東坡 시인의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가 그것이다. 소동파라는 이름은 잘 알지만 그의 이름이 소식蘇軾1036~1101 이라는 것은 잘 몰랐다.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빈산에 사람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이 피는구나!’ 라는 뜻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면 이 말과 어울리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아마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팍팍한 도시생활에 지치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일거다.
잠깐 상상을 해보자. 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햇살이 그리운 봄이다. 새들은 마치 긴 밤을 지나 새벽을 맞이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촉촉한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다. 언 땅은 따뜻한 햇볕에 녹고 말라죽은 덤불사이로 새싹이 파릇파릇하다. 여름철 온 천지를 뒤덮는 망초가 징글징글 하겠지만 봄에 그 새싹은 새로워서 고마울 따름이다. 햇살이 산 가득하지만 그늘진 곳에 새로 올라오는 찔레 순을 꺾어먹는 소녀는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 곳이 ‘공산무인 수류화개’일까.


다시 눈을 감아보자. 여름 불볕더위가 수그러들고 입추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다. 들판에는 곡식들이 알차게 여물고 있고, 과실수들도 튼실하다. 낮은 산등성이에 올라 소를 풀어놓고는 따가운 햇살과 그것을 밀어내는 바람을 즐기고 있다. 문득 깨달았을 때는 소는 온데간데없고 풀벌레소리만 잔잔히 남아 있는 이곳이 ‘공산무인 수류화개’일까.

 

소동파가 열여덟 아라한을 찬송하는 시의 한 구절인 ‘공산무인 수류화개’를 모티브로 ‘공산무인도’를 그린 조선후기의 최북崔北은 기인奇人화가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독특한 그림세계도 있지만 파란한 인생의 여정이 그러했기 때문일것이다.


어떻든 ‘공산무인’을 노래한 서정적 풍류는 최북에게만 있지는 않을게다. 옛 선비들의 시를 만나면 그 가운데 자연과 시인의 합일을 꿈꾸고 풍류를 노래하는 경우가 종종있지 않은가.


‘공산空山’은 불교적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텅빈 충만’이라고 할 수 있는 ‘공空’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다. ‘빈 산’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나무도 있고, 물도 있고, 바람도 있고, 햇빛도 있다. 새도 있고, 짐승도 있고, 풀벌레도 있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데 ‘빈 산’이라 하고, 우리는 그 시어詩語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비움과 나눔의 언어

 

 

최북의 작품은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어버린 자연합일自然合一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 침묵과 은둔의 내적 수행을 느낄 수 있다.
소동파의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나 최북의 ‘공산무인도’는 삼라만상의 진실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진리가 깃들어 있음을 전하고 있다. 밋밋하지만 옛 선사들의 표현을 빌리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山山水水’일 것이다. 가만히 눈 감고 앉아 호흡을 고르고, 그 들숨과 날숨을 바라보면서 감각을 통찰하는 것이 ‘침묵과 고요’를 유지하는 주요 에너지이다.

◀ 최북, 「공산무인도(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종이에 수묵담채, 36.1×31cm, 개인소장

 

최북의 ‘공산무인도’에 비해 이문선작가의 ‘공산무인도’는 더욱 간결하다. 이문선의 작품은 왕릉의 둔덕을 통해 상징적으로 ‘공산’을 표현했고, 장미꽃 한 송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세상과의 소통을 원하는 다소 도발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문선의 ‘공산무인’은 ‘비움과 나눔’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통일의 과업을 눈 앞에 둔 시대적 키워드를 ‘신라’에서 찾았고, 비록 ‘산’이라고 표현하지만 ‘죽음너머’의 세계를 비장하게 맞이하는 ‘왕릉’을 제시했다. 그리고 남은 자의 추모와 애도의 몸짓보다 세상과의 소통, 사람과의 소통, 과거와의 소통, 미래와의 소통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역동적이다. 과거 옛 선조들의 풍류에서 안으로 침잠하는 고요의 에너지와 사뭇 대조적이다. 최북의 ‘공산무인도’에 비하면 훨씬 간결한 이미지로 ‘빈 산에 사람 없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이문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 반대이다. 간결함과 고요함으로 역동과 소통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이미지에서 다시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크게 보면 침묵과 고요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 하나하나가 가지는 역동성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이것을 생명성生命性이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적 안목에서 침묵과 고요는 미시세계의 역동성을 품고 있는 ‘조화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내면의 평화와 자유가 없다면 ‘소통’은 그저 분별심 가득한 ‘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중도中道를 발견해야 한다.

 

박석동 (에코동의 서재 http://ecodong.tistory.com)